【87-13 흥사단사 명장면 50선】제11회, 청소년문화사업단 및 청소년 부설기관 운영
◆ 청소년문화사업단 및 청소년 부설기관 운영 ◆
흥사단문화사업단 설립
1997년 9월 이사회에서 한규인 이사원의 제안으로 문화사업단 설치안이 논의되어 구체적인 계획수립과 타당성을 사업분과위원회에 위임하여 검토하고, 10월에 문화·교육사업단 설립이 확정되었다.
흥사단문화사업단(단장 한규인)의 첫 사업으로 1997년 10월부터 서울특별시 ‘시민복지 5개년 계획’에 의거한 청소년 건전 육성 사업인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을 수탁하여 운영하는 과제가 논의되었다. 이사회(회장 김종림)에서 문화사업특별위원회(위원장 이대형 부이사장, 위원 한규인·박원철 이사원, 조규원 공의원)를 구성하여 공모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였고, 10월 22일 위탁 운영 단체로 선정된 후 12월까지 행사전용 영상, 음향, 조명설비가 되어 있는 매직트론 윙바디 차량을 제작 하여 1998년 3월 28일 마로니에 공원 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은 특히 학생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학교를 찾아가서 행사를 진행했는데 연간 50여회 정도 실시했으며, 각 학교에서는 학교 축제에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의 행사를 매우 선호하였다. 특히 한 번 행사를 유치한 학교에서는 다음 해의 예약을 서둘러 할 정도로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교 축제 날짜를 변경하면서까지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을 유치했다.
초·중·고와 사회복지시설의 행사 및 축제지원, 청소년의 건전한 여가 선용 및 문화공간 창출, 서울시 청소년 정책 홍보를 목적으로 설립된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의 수탁 운영은 본래의 목적 외에 흥사단이 추진하는 각종 수련활동, 국토순례 행사를 지원하여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은 2003년부터 서울지부로 이관되어 서울지부 주관으로 운영되다가 중단되었다. 이동청소년수련광장의 연도별 실적은 <표4-7>과 같다(첨부된 본문 참조).
또한 흥사단문화사업단은 1978년부터 2000년 겨울까지 6회의 국토탐방 캠프와 1회의 중국탐방 캠프를 실시했다. 국토탐방 캠프는 매회 10일 내외에 걸쳐 우리 국토를 답사했다는 점에서 서울지부가 1992년부터 2001년 7월까지 해안선을 따라서 실시한 국토순례 행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청소년 국토순례 프로그램이었다.
1998년에는 강서청소년회관과 공동으로 7월 20일부터 31일까지 11박12일 일정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 망배단까지 총 360km를 도보로 이동하는 ‘98하계국토횡단캠프’를 실시했다. 이 국토횡단캠프에는 초등학생 71명, 중학생 49명, 진행교사 30명 등 총 150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고성의 건봉사지에서 출발하여 진부령, 인제군 서화고개와 두솔산을 넘어 평화의 댐을 지나 화천군 율대리와 부촌리로 행진했다. 그리고 철원군 문혜리, 연천군 대광리, 백학저수지와 문산초등학교를 거쳐 임진각 망배단까지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행진함으로서 부모님과의 만남을 통한 가족애와 국토사랑의 정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게 되었다.
흥사단문화사업단은 1998년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목포에서 선박 편으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도 일원을 탐방하는 ‘98동계제주탐방캠프’를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 국토를 횡단 또는 종단하는 캠프를 다섯 차례 더 운영하며 청소년들에게 강인한 인내력과 협동심,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문화사업단이 실시한 6회에 걸친 국토탐방 캠프의 시기, 행사명, 코스와 참가인원은 <표4-8>와 같다(첨부된 원문 참조).
흥사단청소년연구원 개원
1992년 3월 29일 제2회 ‘이념과 프로그램 연구 세미나’에서 최영태(전남대 교수)의 제안으로 4월 13일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4월 25일 공의회에서 청소년연구원 운영규정의 승인을 받아 5월 16일 본부 강당에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소년연구원을 개원하였다. 초대 원장에 윤세긍, 부원장에 이윤배, 상임부원장에 김영진, 감사에 남무호가 선임되었다. 이에 앞서 서울지부는 1987년부터 청소년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연간 200~400여 명을 대상으로 진로상담, 집단상담, 학습습관형성 프로그램, 학부모 강좌 등을 실시해 왔다. 이를 계승하고 확대 개편하여 기존의 상담활동 외에 청소년문화 개발을 위한 연구, 국제화 시대에 대비한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을 목적으로 청소년연구원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연구원의 기구와 기능은 다음과 같다.
연구실: 연구보고서 발간,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 연수모임활성화, 본부 위탁프로그램 진행 및 연구
상담실: 집단 및 개인 상담프로그램, 외부상담기관과의 협조체제 구축, 학습습관형성 프로그램 운영, 부모를 위한 자녀교육프로그램 실시, 교사와 부모를 위한 상담프로그램 실시, 지방상담실 지원
문화실: 건전한 청소년문화의 창출을 위해 5월 청소년의 달 문화행사 기획·운영, 전통놀이문화 보급, 문화체육부 관련 행사 진행
행정실: 운영자금 관리, 지원, 후원회 조직 및 관리
청소년유해환경고발센터: 청소년 비행·탈선 예방, 건전한 문화환경 조성, 유관기관 실태파악 및 자료 수집, 환경캠페인, 의식조사 보고서 작성
이어서 1994년 10월 28일에는 청소년상담센터를 개소하였다. 상담센터는 본부 4층에 40평 공간을 임대하여 사무실과 4개의 상담실과 강의실을 확보하고 김영진 부원장이 실장을 겸하여 김숙영 간사와 함께 청소년 유료 상담센터를 열어 전문적인 상담활동을 병행하였다. 1995년 9월에는 학습상담 지도자 양성과정을 시작하였고, 12월에는 학부모교실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1995년 발전기획위원회에서 청소년연구원 활동이 고액의 상담료를 받는 상담사업에 편중되어 영리추구의 사업으로 비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청소년문제 연구조사 및 청소년정책 개발 등을 균형 있게 실시할 것을 요구(1995년 6차 이사회)하는 등 상담실운영 방향에 대한 여러 차례의 논의가 있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본부의 재정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상담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수익사업이 불가피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한 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다.
2001년 2대 원장에 취임한 이장호(서울대 교수)는 3월에 초등학생심성계발훈련과 청소년리더십아카데미를 운영하였다. 2002년 3대 시민운동본부를 포함한 부설기관 통합사무국 운영에 따른 본부의 공간 조정방침에 따라 청소년연구원의 공간 축소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2003년 연구원(원장 박성규)은 본부의 방침에 따라 5층에 상담실 1개와 회의실 겸 사무실 1개를 확보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서울지부(지부장 박인주)의 부설기관운영세칙 제정에 따라 수익사업과 관련된 상담실을 서울지부로 이관하였다.
2004년 7월 1일 본부 이사회는 청소년연구원 실무인력으로 본부의 이은숙 부장을 겸직 발령했다. 9월 13일에는 임원을 개편하여 한만길, 서주원, 김소선, 장동현을 운영위원으로, 이은숙을 실장에 오혜련을 간사로 임명했다.
2005년 연구원(원장 이윤배)은, 본부(이사장 구치모)의 방침에 따라 이은숙이 흥사단운동연구소 설립준비를 맡고 오혜련 간사가 사임함으로써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2007년 본부(이사장 박인주)는 김소선을 제5대 원장에 임명하여 활성화를 도모했으나 2013년 현재까지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청소년연구원은 설립초기부터 의욕적인 사업과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왔고, 유료상담실 운영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조직체계와 운영상의 문제로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의 청소년연구원 사업실적은 연도별로 요약된 원문(첨부자료)과 같다.
흥사단청소년재단 설립
재단 설립의 배경
1993년 10월 당시 수원지부 소속이었던 한명희 단우가 수원지부 단소마련기금으로 600만원을 기부하고, 이어서 흥사단 발전을 위하여 재정적인 기여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박의수 수원지부장에게 밝힌 바 있다.
그 후 1994년 3월 10일 “본인은 흥사단의 목적에 찬동하여,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흥사단의 운동과 사업이 더욱 효율적이고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하여 본인 소유의 성수역주유소(서울시 성동구 성수2가 317-3 소재)를 기본 자산으로 출연하여 재단법인을 설립 운영하고자 하오니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서를 김종림 이사회장에게 제출하였다.
흥사단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그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재단 설립 절차에 관한 실무를 사무총장(박성규)에게 명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단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단법인 설립의 최소 요건으로 기본자산 3억 원이 필요하나 성수역주유소는 그 당시 공시가격과 담보설정에 따른 차액 등을 감안한 평가액이 3억에 미치지 못하여 재단 설립 업무가 일시 중단되었다. 그 후 한명희는 현금 2억5천만 원과 정가기준으로 5천만 원에 상당하는 자신의 저서를 기증할 터이니 그 책을 팔아서 5천만 원을 채워 설립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으나, 검토 결과 현실적으로 적절치 못한 제안으로 판단하여 재단 설립 추진이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이사회장은 모처럼의 숭고한 뜻을 살리기 위하여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부족한 5천만 원을 흥사단에서 출연하기로 결정하였고, 업무추진비와 경상비 500만원을 합하여 5,500만원을 흥사단이 출연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재단 설립 업무가 추진되었다.
당초에 재단의 명칭을 ‘흥사단후원재단’으로 하기로 하였으나, 설립인가 과정에서 특정 단체를 후원하는 목적의 재단 설립은 곤란하다는 지적에 따라 ‘도산청소년재단’으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재단법인 설립 절차를 모두 마치고, 1996년 1월 10일 서울시에 법인 등록이 완료되었다.
도산청소년재단 설립
1996년 1월 10일 흥사단 본부에서 창립총회 준비를 위한 첫 임원회를 개최했다. 한명희, 박의수, 이용석, 김태석, 김윤휘, 이용민 등이 참석하여 기본적인 사업 계획을 협의하고, 25일에 현판식과 창립 축하연을 하기로 결정 하였다.
1996년 1월 25일 오후 7시 약 40명이 참석한 가운데 흥사단 강당에서 재단 창립총회 및 축하연이 개최되었다. 반재철의 사회로 박의수가 경과보고를 하고 한명희 재단이사장의 인사에 이어 김종림 흥사단 이사회장과 안기영 전 이사회장의 축사 그리고 만찬의 순으로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재단의 초대 임원은 이사에 한명희(이사장), 박의수, 박성규, 반재철, 이용석, 김윤휘, 감사에 김태석이 선임되었다. 창립 당시 정관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3조(목적): 이 법인은 문화체육부 소관 비영리법인의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에 따라 청소년 수련활동과 문화진흥을 위한 사업, 청소년 복지사업을 시행 및 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4조(사업): 청소년 수련활동 및 문화활동 지원,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의 연구개발, 청소년 지도자의 양성 및 연수비 보조, 청소년 문화의 진흥을 위한 홍보․출판 사업.
제5조(이익의 수혜자): 4조에 규정한 목적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 수혜자에게 제공하는 이익은 무상으로 한다. 다만, 수혜자에게 그 대가의 일부를 부담시킬 때에는 미리 주무 관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제6조(임원의 종류와 정수): 이 법인에 두는 임원의 종류와 정수는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5인, 감사 1인으로 한다.
제7조(상임이사): 사업을 전담하기 위하여 이사장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이사 중 1인을 상임이사로 임명할 수 있다.
제23조(재산의 구분):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으로 구분하며,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재산은 기본재산으로 한다. ①설립시 기본재산으로 출연한 재산, ②기부에 의하거나 기타 무상으로 취득한 재산. 다만, 기부의 목적에 비추어 기본재산으로 하기 곤란하여 주무 관청의 승인을 얻은 것은 예외로 한다. ③보통재산 중 이사회에서 기본재산으로 편입하기로 의결한 재산, ④세제 잉여금 중 적립금.
제24조(재산의 관리): 기본재산을 매도, 증여, 임대, 교환하거나 담보에 제공하거나 의무부담 또는 권리를 포기하고자 할 때에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본재산은 연 1회 그 목록을 작성하여 주무관청에 보고한다.
제33조(임원 등에 대한 재산대여 금지): 이 법인의 재산은 이 법인과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사항이 있는 자에 대하여는 정당한 대가 없이 이를 대여하거나 사용하게 할 수 없다. ①이 법인의 설립자. ②이 법인의 임원. ③앞의 1,2호에 해당하는 자의 친족관계에 있는 자. ④법인과 재산상 긴밀한 관계가 있는 자.
주요 사업 실적
(1) 청소년 수련활동 및 문화 활동 지원: 첫해인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위인전기 독후감 공모사업(3~4개 지부), 청소년자원봉사활동, 통일꾼수련대회, 통일백일장, 청소년쉼터, 유해환경감시단, 역사탐방, 국토순례, 인성훈련 등의 사업에 연평균 약 2,000만원씩 총 6,114만원을 지원했다.
(2) 청소년 지도자 양성 및 연수비 지원: 1996년부터 3년간 총 750만원을 지원했다.
(3) 홍보 출판사업: 재단 홍보와 건전 청소년 문화 육성을 위한 소책자 아름다운 세상 발간에 1996년부터 3년간 총 1,101만원을 지출했다.
1999년 이후 예금 이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자수입이 줄어들고, 재단의 추가적인 모금 활동도 여의치 않아서 목적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재단 이사회의 결의에 의하여 목적사업은 3개 지부에서 지속적으로 행하는 위인전기독후감 공모사업 지원(매년 3,400만원)과 최소한의 경상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기본재산으로 적립하여 당분간 기금을 확장하는데 노력하기로 했다.
흥사단청소년재단으로 개편
도산청소년재단은 창립 이후 약 17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임원이 교체되었다. 윤세긍 박사가 약 3년 동안(2002.1~2005.5) 이사장을 역임한 외에 한명희 이사장이 재단을 주도해 왔다. 자산 역시 한명희 이사장의 추가 기부금과 몇몇 이사들의 기부금 및 사업수익이 추가되어 2012년 말 현재 557,040,609원으로 증액되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흥사단 내외의 신뢰와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었다.
그러던 중 2011년 새로 영입된 김소선 이사는 2003년에 선포한 흥사단 비전2013에 명시된 “도산청소년재단을 기초로 장학기금 등 관련 재원을 통합하고 기금의 확충을 통해, 청소년 육성과 지도자 양성 및 우수 학생 장학 사업을 실효성 있게 뒷받침할 수 있는 규모 있는 재단을 형성한다.”는 취지에 따라, 흥사단 장학기금(369,256,698원)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2012년 1월 13일 도산청소년재단 이사회는 목적사업에 장학사업을 추가하며, 흥사단장학위원회 위원을 흡수하여 이사정원을 15명으로 증원하고, 재단의 명칭을 ‘흥사단청소년재단’으로 하는 내용으로 정관을 변경할 것을 결의했다. 5월 11일 서울특별시로부터 정관 변경 승인을 받고, 6월 29일 본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흥사단청소년재단’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2013년 2월 흥사단 공의회에서 흥사단 장학기금을 흥사단청소년재단으로 이관하도록 최종 승인을 얻게 되었다.
2013년 5월 흥사단청소년재단 이사회에서는 한명희 이사장의 사임에 따른 후임 이사장으로 김소선 이사를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당초에 흥사단 후원재단을 설립하고자 했던 한명희 이사장의 뜻을 살리고, 흥사단의 청소년 사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재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 자료출처 : 『흥사단100년사』. 2013. pp.586-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