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을 합창하며 울고 웃었던 20년
- <제20회 동북아 평화문화제> 회고하며
1997년 3월.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가 창립되었다. 창립발기인은 1,049명 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두 번 강산이 변하는 세월, 이십년이 되었다.
제1회 한․중청소년 친선문화제는 1988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심양(옛 봉천) 연변(연길)에서 개최 되었는데, 심양에서는 청소년 친선 축구대회가 개최되어 역사적인 민족 동질성 회복과 민족정기함양 한핏줄, 한겨레임을 확인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한․중 수교 전후 민간단체의 중국동포와 끈끈한 정을 잇는 사업이었다.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중 우리혈족이 제일 많이 사는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자치주의 우리의 말과 글을 잇도록 노력해온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조선어문학부)의 정판용 교수, 손동식 총장, 김호웅 교수, 이봉우 교수 등 원로교수님들의 피눈물 나는 분투노력의 덕으로 친선문화공연, 글짓기 백일장, 친교의 밤이 이어졌다. 4회째인 2001년까지 축구대회는 이어졌고, 고구려 유적(집안), 광개토대왕비가 벌판위에 드러나 있는 상황을 실제 목격했고, 국내성 현지에서는 그때의 역사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돌리기 힘들었다. 제일 크게 회고되는 대목은 집안박물관 개관 직전에 국내 방송사(KBS, MBC, SBS)등과 같이 목격한 소위 동북공정, 역사왜곡의 발견이었다.
고구려의 역사를 소수민족, 정권이라 칭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자기들만의 역사로 만들려는 기록을 촬영, 국내에 특종으로 보도됐고 국민여론은 들끓었다. 결국 중국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는 우리정부에 구두사과를 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이 문제가 국민의 역사관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하늘나라에 계신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김구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상론 후 흥사단 후예인 흥민통 단우와 청소년 방문단에게 기회를 주신 것 아닌가!’하고 회고되어진다.
중국 연변 용정시 용정중학교에 광복 후 처음으로 많이 모였다는 오천여명의 동포들과 함께한 감격의 친선문화제! 애국가와 중국국가가 연주될 때와 아리랑을 합창 하며 함께 울고 또 웃었던 일들이 엊그제 같다. 심양, 만융촌(촌장: 이문길) 5백호의 조선족 최대 마을 노인들을 위한 마을큰잔치를 베푼 일과 흑룡강성 방송국과 함께한 안중근의사 의거지 방문, 백일장사업, 발해유적지 탐방 등도 세월이 흐르면서 이어진 사업이었다.
창립에 공이 크신 故김종림 흥사단 이사장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 단우님들과 백일장을 위해 본인의 사재로 장학금을 낸 박원철 상임대표, 한여름 휴가 반납하고 봉사에 나선 故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 교사 신분에 열정적으로 제자들과 매년 참가한 류종열 대표(현 이사장), 흥사단 기념사업 100주년을 성공리에 치룬 반재철 이사장, 백일장 인연을 소중히 이어온 나종목 위원장, 임원 등 수 많은 얼굴과 이름들이 스쳐 지나간다.
도산 안창호선생님의 흥사단 창립정신이 남북평화통일 시대로 이어져 민족번영을 이루어 흥민통이 이 시대에 더욱 소중히 빛을 발하기를 소망하면서 20주년 회고사에 가름한다.
- 글 :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 양영두

‘평화’를 알아간 시간
- <동북아 평화 문화제> 참가기
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즉 소유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동북아 평화문화제는 옷, 음식 등 물질적 소유물로 이야기하러 모인 자리가 아니었다.
이번 문화제는 우리를 세상이 규정한 무엇을 ‘소유’한 우리들이 아닌 평화 마인드가 확립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흥사단을 알게 된 건 작년 이맘때 쯤이었다. 그 때 나는 동북아 평화통일탐방대원으로 참가했었다. 6박 7일이라는 시간동안 했던 많은 활동들이물론 정말 의미 있었지만, 흥사단과의 인연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 당시 조선족, 일본인 친구들과 안개로 뒤덮인 백두산을 함께 오르면서 자연스레 내게 스며들게 된 동포의식과 평화 통일마인드였다.
이번 8월 11일~12일에 열린 <동북아 평화 문화제>도 정말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연길에서 오신 많은 교수님들 또 동포들. 더불어 ‘동북아’라는 명칭에 알맞게 일본인 참가자까지. 많은 인연들을 알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여러 행사들이 있었지만 하나가 되어 가까워지게 한 데 큰 비중을 차지 한 건 저녁식사를 마치고 했던 난타와 춤 테라피였다. 나도 참가자들도 춤 테라피는 처음이었다. 또 자신의 몸짓으로 평화를 표현하는 것도 우리 모두 다 처음이었다.
특히나 상대방의 눈을 가리고 자신을 따르게 하며 추는 춤은 평화가 나, 상대방 둘 중 하나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상태가 아니란 걸 알았다. 눈을 감고 상대방에 이끌리며 평화의 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의 갈등은 왜 생겨났을까? 상대방을 믿지 못한 불안감이 아집으로 똘똘 뭉쳐서 그게 갈등으로 번진 적이 꽤나 있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하는 성찰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좀 더 큰 단위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남한, 북한, 중국 사이 갈등도, 한국과 일본 사이 갈등도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쌓여온 불신, 고집들이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갈등 원인에 대해 성찰하니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도 좀 더 명확해진다. 일단, 흥사단에서 주최하는 이런 평화문화제에 참가하는 거다. 무엇이든 배우려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부딪히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는 나 먼저 ‘평화마인드’를 가지는 거다. 거짓 언론 보도에 놀아나지 않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시민이 되는 거다. 개인이 한 발 한 발 내딛는다면 결국 우리는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 좀 더 강한 평화 주체가 되지 않을까.
끝으로 토론 시간에 한 토론자가 말했던 발언이 잊을 수 없다. 통일은 목적이 아니라고, 목적은 평화이며 통일은 수단이라고. 통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평화통일이 아닌 무력통일을 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이는 맞는 말이다. 무력으로 통일을 이룬다 해도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통일이 너무 멀지도 늦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 때까지 평화마인드가 더 많이 자란 사람이 되고 싶다.
글 : 흥민통 대학생통일아카데미 8기 기장 윤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