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정부와 도산 안창호: 접경(接境)과 접경인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도산·임시정부 발자취 탐방' 소감문
중앙대·한국외대 교수 2명과 연구보조원 4명은 흥사단과 함께 대일항쟁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뜻깊은 답사기회를 가졌다. 8월 28일 인천에서 출발해 상하이, 자싱, 하이엔, 항저우, 난징, 충칭을 거쳐 9월 1일 인천으로 돌아오는 4박 5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만큼 알차게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베이징과 동북3성 외 다른 지역을 가본 적이 없었던 터라 많은 기대를 갖고 참가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 매만가 김구 피난처, 난징 대학살 기념관, 난징 총통부, 이제항 위안소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등 여러 곳을 탐방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와 충칭 임시정부청사였다. 전자가 부서 간 구획이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 셋방살이처럼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면 후자는 부서마다 독립된 공간에 군대도 갖춘 꽤 완비된 정부청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처음 수립되어 1940년 9월 충칭으로 옮겨오기까지 21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아 꾸준히 위용을 갖춰나간 것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설립된 곳은 상하이 말고도 두 곳이 더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경성의 한성임시정부였는데, 같은 해 9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민족의 역량을 집중시킬 곳으로 상하이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제를 견제할 수 있는 서양 열강들의 조계지가 위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1차 아편전쟁(1839-1842)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1842년 난징조약으로 조계를 허용하게 된 다섯 개항장들 가운데 하나였다. 1846년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조계가 차례로 건설되었다. 조계라는 공간은 이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비롯된 공간이었지만, 청나라 측에서도 서구인들을 중국인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허용한 변경의 공간이기도 했다. 서구열강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영향력이 함부로 행사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중국,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세력의 경계들이 중첩된 일종의 ‘접경공간(接境空間, Contact Zone)’이었던 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중국의 지원도 받으면서 서양 영사관들을 통해 국제사회의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택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1919년 5월 임시정부 영수들 가운데 가장 먼저 상하이에 도착해서 6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했다.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와 리버사이드 등지에서 먹고 살기에만 급급했던 동포들을 단결하고 계몽하여 조직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도산은 곧바로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지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 행정수반 직을 제안받았으나, 개인의 명예보다는 단합을 우선시했던 도산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진영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사했다. 도산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감되기까지 임시정부에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갈등, 서북파와 기호파 간의 지역갈등, 무장투쟁론·외교독립론·민족개조(실력양성)론 간의 방략론갈등 등을 해소하고 치유하여 자유와 독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화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진영 간의 갈등이 첨예할 때 이편도 저편도 아닌 자는 경계인으로 고립되고 마는데, 도산은 진영 간의 화해와 공존, 통합을 위해 헌신했다. 어느 진영에 속하거나 편을 들어 갈등을 부추기기보다는 ‘접경인’으로 남기를 택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극심한 내적갈등과 외적갈등을 겪고 있다. 개인적으로 2011년 7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5년 반이라는 기간을 런던에서 보내면서 재외국민 자격으로 투표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외국 나가 살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매번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주영한국대사관까지 가서 국민의 권리를 행사했다. 재외국민 투표자의 영향력은 하잘것없었지만 만족스런 선거 결과가 나왔다. 일각에선 수도권 대 비수도권 구도가 심화됐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왔으나 지난 수십 년간 불필요한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켜 온 뿌리 깊은 지역구도가 다소 완화되었고 다당제의 가능성이 보였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70-80년대 정치지도자들의 정치공학에 의한 창작물이었던 영호남 갈등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곧바로 훨씬 더 치명적인 갈등들이 자리를 메웠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촉매로 젠더갈등이, 세월호 참사와 이어진 촛불정국 직후에 세대갈등이 양극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갈등은 인간사 어느 곳에나 응당 존재하는 것이고 갈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유하고 화합으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갈등을 부추겨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자기진영 굳히기에만 힘을 쏟으니 이 갈등들은 이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이 목격하고 개탄했다는 동포 간 상투잡이가 2017년 귀국한 내 눈앞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대외적인 상황 역시 20세기 초 한반도가 처했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푸틴의 러시아와 시진핑의 중국, 아베의 일본과 트럼프의 미국까지 대한민국은 스트롱맨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러시아·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세력과 미국·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의 접경공간에 놓여있는 지정학적인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소련과 미국의 이념갈등 속에 한 민족끼리 대리전(proxy war)을 치러야 했던 잔혹한 시절로부터 불과 7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작금이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외려 극단적인 형태의 민족주의이다. 하나가 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민족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민족중심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민족주의가 위험한 것이다. 도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애기애타(愛己愛他, Love others as you love yourself)’의 마음가짐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서로를 탓하기 전에 도산의 말씀인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를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약 1,800여 년 전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주의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도 『명상록(Τὰ εἰς ἑαυτόν)』에 비슷한 내용의 글을 남겼다. 그 글로 소감문의 마무리를 갈음하고자 한다.
Μηκέθ᾿ ὅλως περὶ τοῦ, οἷόν τινα εἶναι τὸν ἀγαθὸν ἄνδρα <δεῖ>, διαλέγεσθαι, ἀλλὰ εἶναι τοιοῦτον.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를 따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너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라.)
Marcus Aurelius, Τὰ εἰς ἑαυτόν 10.16.
* 글 : 반기현(단우, 중앙대학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