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100주년 기념 <제1차 한인회의>에 참여하여
3·1운동은 한국 민족의 최대 최고의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에 한민족은 잠에서 깨어나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나라가 망해 흩어진 민족이, 3·1운동으로 하나가 된 기적적인 일이 생긴 것이다. 일본도 놀라고, 3·1운동을 전개한 한민족도 놀랐다. 한민족은 전 세계에 평화적으로 한국의 자유독립을 선언하였다.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한민족 전체가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바로 3·1운동 정신에 기반을 둔다고 대한민국 헌법 서문에 명시되어 있다.
1919년 3월 1일 애국지사 현순 목사는 대한인국민회의 총회장인 도산 안창호에게 3·1운동 소식을 알렸다. 3·1운동의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1919년 3월 9일자로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에게 파리로 건너가 한인대표들을 도와 달라는 내용의 전보문을 보냈다.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3·1운동에 대한 후속 조치를 즉각 취하였다. 한달이 지난 1919년 4월 1일 도산은 황진남과 정인과를 대동하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역사적으로 도산이 상해로 움직인 것은 민족운동의 중심이 상해로 이동되는 사건이 되었다. 도산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 지도자를 소집, 제1차 한인연합 대회(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그 당시 미주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지도자 150여 명이 참석했고, 흥사단 단우로는 조병옥, 임초, 천세헌 등이 참석하였다. 조병옥은 3·1운동 소식을 콜럼바아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접한다. 임초 단우는 1913년 미국 뉴욕에서 흥사단에 입단하고, 1910년대 뉴욕에서 수학하며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대회에서 일본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한명이다. 천세헌 단우는 1910년 뉴욕으로 옮겨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고, 1914년에는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019년 4월 12일부터 열린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개최 100주년 기념행사가 한미 양국 정부의 지원과 재미교포 단체 등의 큰 호응으로 14일 밤에 성공적인 막을 내렸다. 3일 동안에 학술발표, 만세 시가행진, 기념평화음악회, ‘한미 친선의 밤’ 문화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 흥사단을 포함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및 재미 한국학교, 미국시민 등 연인원 3,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개막 행사에서는 한국정부가 100년을 이어 ‘제1차 한인회의’를 지원해 온 필라델피아시 당국에 감사장을 전달하였고, ‘제1차 한인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이 낭독되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둘째 날의 만세 시가행진은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된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1,500여 명의 인원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필라델피아 경찰과 양국의 대형국기가 앞장서고 국내·외 정관계인사, 한인단체, 펜실바니아주 인근 3개주로부터 모여든 한국학교 학생들이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약 1.5마일 거리를 행진하였다. 행진 간에는 한국 전통악대(취타대, 필라델피아농악대), 미국 종교음악대(구세군 밴드), 한복을 입은 교민, 대회로고가 새겨진 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행진하여 많은 시민들로부터 환호를 받기도 했다. 이번 행사는 미국과 한인 2세들에게 3·1운동을 전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권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 그 의미가 크다. 행사 기간 내내 많은 독립유공자 후손들도 참가하였다. 서재필과 함께 ‘한국친우회’를 만들어 미국 전역에 23개 조직과 25,0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한국독립을 도운 톰킨스 목사의 후손 가족들도 멀리 알래스카주에서 찾아와 행사 내내 자리를 하였다. 시가행진 후 Church of the Holy Trinity에서 열린 매스터코랄 합창단의 기념평화 음악회에는 60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 교회는 한국독립을 위해 많은 집회가 열린 역사적인 장소이다.
1919년도의 제1차 한인대회에서 서재필과 손발을 맞춘 조병옥 단우는 3·1절 2주년 기념식을 뉴욕 타운홀에서 개최한다. 1,4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이 때 대회장이 바로 서재필 박사이다. 기념식 후에 대회장인 서재필 박사와 미국인 킴벌랜드 여사, 길모어 교수, 라이머 박사, 정한경, 조병욱 등의 주도로 한인들이 모여 교회 창립을 논의하였다. 이후 매디슨 애비뉴 감리교회 삭크만 목사의 주선으로 우선 그의 교회를 사용하여, 1921년 4월 18일에 교회를 창립하며 1923년, 1927년 두 번의 이전을 통해 콜럼비아 대학교 근처에 교회 건물을 사게 된다. 1928년 1월 1일 뉴욕한인교회에서 한국의 대한애국부인회가 전신인 근화회가 조직된다. 3·1운동을 주도했던 김마리아, 황애덕 단우 등이 뉴욕한인교회에 다시 모여 독립운동의 기치를 다시 높이 든 것이다. 뉴욕한인교회는 3·1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는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며 영문 이름은 'The Korean Church and Institute’ 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이 방황할 때에, ‘배워서 독립을 이루자’하고 교회 이름에 ‘Institute’를 넣은 것이다. 1911년 9월 3일 도산이 뉴욕항구에 내린 이래 1920년대까지 미국 동부지역에서 활동한 흥사단 단우들은 약 40여 명이 된다. 이들 대부분이 3·1정신으로 무장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한 건국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 글 : 윤창희(미주위원부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