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은 일생을 통해 4차례 감옥에 투옥되었다.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자, 의거 가담 혐의를 받은 도산은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취조 받은 후 영등포 감옥에 투옥되었다. 두 번째는 1927년 만주 길림성 대동문 밖 최명식의 집 대동공사 창고에서 나석주의사 추도식 겸 강연회가 개최된 자리에서 4~500여명의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하던 중 무장한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길림 경찰청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세 번째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 날, 상해 하비로 보강리 27호 이유필의 집에서 체포되어 상해 양수포 일본 헌병사령부(현재 사천북로 허창로 227롱)로 송치, 취조를 받은 후 국내로 압송되어 재판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네번째는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또 다시 투옥되었다.

1930년경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의 입국
1932년 6월 2일 오전 11시, 안창호와 장현근, 김덕근 등과 함께 상해 황포탄에서 경안환(慶安丸)에 올랐다. 일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선박계에는 안창호의 이름을 무목선치(五四)라는 일본인 가명으로 올렸다. 4일 오전 8시에 청도(청도)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려 다음날인 5일 오후 5시에 출항해, 7일 오전 7시 15분에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상해 일본 총영사관 경관 후등손대랑, 전중만수이, 산전각병위, 장전이세장 등 4명이 도산을 호송하였다. 인천항에서는 경기도청 사찰부 사찰계 미와카즈 지로(三輪和二郞) 경부와 인천서 고등계 고촌(高村) 경부가 경비선을 타고와 도산을 비롯한 3명과 총영사관 경관들 4명을 태우고 상륙하였다. 1910년 4월 한국을 탈출하여 중국과 러시아, 만주, 그리고 미국 등지로 23년간을 이역풍상을 겪으며 도산은 54세의 나이로 고국 땅을 밟았다. 인천항 부두에는 도산의 친형 안치호와 누이동생 안신호, 조카딸 안맥결, 종제 안봉호, 조만식, 김동원, 허헌, 이덕환, 김성업, 김병연 등 친인척 및 친우 30여명이 마중 나왔다. 그러나 도산은 경관의 인도를 받고 곧바로 경찰차에 올라타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갔으며 그곳에 구치되었다.
경성 지방법원에서 취조를 마친 도산 일행은 동일 오후 5시 반 서대문 경찰서 길야 고등계 주임 이하 수명의 경관에게 철갑을 채운 채로 경기도 경찰부로 호송되었다. 이튿날 8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삼윤 경부의 취조를 받았다. 경성 지방법원 검사의 구인 영장으로 도산과 금덕근, 장현근 등 3인은 1932년 6월 7일 오전 9시에 경성 지방법원 구치소에 수용이 되었고 동일 12시 40분에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의 좌좌목 검사의 심문을 받았다. 현행범이 아니라 검사의 구인장에 의한 압송이므로 일단 석방되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기소되어 경기도 지방법원 유치장에 유치되었다.
도산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수감되었을 때, 경찰당국은 10여개의 다른 감방에 유치되었던 수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도산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을 우려한 조치이다. 도산을 취조하던 삼윤은 도산의 인격에 감복하여 자기의 힘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죄가 가볍도록 조서를 작성하여 검사국에 송치했다고 한다. 후일 도산은 “만일 삼륜이가 사실 그대로 조서를 작성하였더라면 나는 극형을 免치 못하였을 것인데 나를 살려 준 것은 삼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곳에서 집중 취조를 받은 후 6월 7일에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검속되었다가 7월 15일에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되었다. 사건이 검사국으로 송국되면서 도산의 신병은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19일부터 경성 지방법원 좌좌목 사상 검사가 서대문형무소로 출장하는 식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취조가 시작되었다. 7월 25일자로 구류 기간 만기와 동시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면서 도산은 경성 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기까지 도산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39일동안 투옥되었다. 도산은 치아가 없어 근 3개월 간이나 유동식만을 취하였고 장염과 학질에 걸려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당시 한국 최초의 치과 개업의였던 함석태(咸錫泰)에게 의치 치료를 받아 1개월만에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다.

안창호가 김창세에게 보내는 편지, 1932년 5월 24일
1932년 5월 24일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 구치소에서 안창호가 당시 상해에 있던 동서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은 조선으로 이송되어야만 석방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석방을 위해서 힘쓰지 말라는 내용.
서대문 형무소 생활
4년형을 언도받고 일심에서 공소권을 포기한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 내 교수대 북쪽에 새로이 지은 신감 4동에 72개 감방은 개선의 빛이 전혀 없다고 판정된 중대 정치범들만 수감하는 특수 감방이었는데, 도산은 7호실에 입감해 있었다. 바로 옆 6호실에는 김정연, 5호실에는 여운형, 그리고 8호실에는 오동진이 수감되어 있었다. 도산 바로 옆 감방에 투옥된 김정연은 당시 서대문 형무소 독방의 형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독방은 대개가 다다미 한두장 깔릴 만한, 채광이 잘 안되는 비좁은 방이었는데 그 속엔 조그만 똥통이 하나 놓였을 뿐이다. 겨울엔 얼음창고 같은 감방 안에서 손발이 전부 凍傷을 입어 칼로 썩은 살을 베어 내어야 했고, 여름엔 한증막 같은 속에서 땀을 줄줄 쏟으며 피부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독방과 독방 간에는 두께가 2척이 넘는 시멘트 감방 벽이 기로놓였지만 감방 벽을 딱딱 두드리는 소위 타벽통보법을 극비밀로 사용하여 수감자들이 서로 소통하였다고 한다. 3·1절이나 국치일엔 작업을 하지 말자든가, 내일은 안중근 의거 날이니 작업을 일체 중지하자든가 하는 것을 서로 전파식으로 연락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동맹파업으로 대항 투쟁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지사들은 타벽통보법에 능숙하여 암호연락이 잘 되었지만, 해외에서 검거 투옥된 동지들은 대개 그 암호법을 몰라 중간에서 암호연락이 두절되는 일이 있었다. 따라서 연락이 두절되어 곤란받지 않도록 그 옆방 동지가 타벽통보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김정연은 순찰간수들의 눈초리를 피해가면서 두주일 동안에 여운형에게 타벽통보법을 가르쳐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산이 있는 7호 감방만은 전후좌우에 감시가 심해 도무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한달에 두 번 작업을 쉬는 어느 일요일에 도산에게도 암호법을 가르치다가 발각 위기에 처하자 김정연은 도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마구 고함을 치고 ‘발광’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만약 타벽통보법을 배워 소통하려 한 행위가 발각되었다면 도산도 예외없이 “용서 없이 계호계로 끌려 가서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눈알이 빠지도록 매를 맞고, 두 손을 뒤로 묶여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무게가 다섯 관이나 되는 소위 철제 땅방울을 달고 3분지 1의 감식벌을 받는 동시에, 2, 3년의 가형까지 받게 될 것”이었다. 김정연은 ‘발광’ 대가로 수갑을 뒤로 찬 채 악형을 당하며 3주일을 비참히 지내야 했다. 도산은 고통받는 그를 눈물로 위로해 주며 “김군, 참으로 미안하다. 너 죽지 말고 살아서 우리 민족의 숙원인 독립을 달성하자.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하고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도산은 허리 신경통으로 고생하였다. 앉기가 불편할 정도였고 날이 추우면 그 증상이 한층 심해져 곤란을 당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만 편지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다른 곳으로 편지할 사정이 생기면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도산은 부인에게 편지를 자주 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전하였다. 물론 오가는 편지 모두 검열당했기에 깊은 의중의 이야기도 할 수도 없었다. 도산은 가족들이나 친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형무소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적어보내지 않았기에 당시 형무소 안의 생활실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도산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혁명 동지인 이강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 서대문 형무소 부근 관동에 방을 얻어 살림하면서 음식을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차입하며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봉투를 붙이든가 그물을 뜨는 일을 하며 하루 일과는 보냈다.
당시 형무소에는 일본인과 한국인 간수가 복무하였다. 한국인 간수 중에는 일본인 간수 이상으로 사상 정치범에게 무지하고 악독하게 대하는 자가 많았지만 그래도 일본인 직원들의 이목을 피해 가면서 음으로 투옥된 이들에게 옥중 고초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소식과 일본위 정책을 알려주며 서신과 접견 등 내외 연락의 편의를 도와주었다.
서대문 감옥 간수인 박영준은 도산에게 면회자가 있을 때는 교묘한 방법으로 일본인 입회 부장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고 그 틈을 타서 도산을 면회실로 모시고 갔다. 도산은 면회실에 들어갈 때마다 박영준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며“우리 악수합시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이나마 우리 동포의 따뜻한 손을 잡는 것을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하였다. 이광수가 1주일에 한 번씩 면회할 때면 이광수에게‘春園, 내가 해외에서 생각할 때에는 국내동포들은 전부가 일본인에게 동화되어 민족정신이 여지없이 말살되었으리라고 추측하였더니 이번 고국에 돌아와 보니 폭학한 일인치하에 있는 이 감옥 안에도 이분과 같이 민족정기를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지옥에서 불타를 만난 것같이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소이다. 우리 민족이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러이 느끼게 되었소. 춘원은 이분과 아무쪼록 자별하게 지내주기 바라오.’라고 말을 하면 그는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 글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이명화
- 사진 : 도산 안창호 선생 재소자 신분카드(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 직후 체포된 모습,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상해일본영사관 경찰서 검거, 국내로 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