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4개월 만에 이루어진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지난 2월에 ‘설 계기 이산가족상봉’이라는 이름으로 1, 2차로 열렸다. 본부 공의원 임채승 단우가 2차 이산가족상봉단으로 참가하여 그리웠던 사촌 형님을 만났다. 상봉이 끝난 며칠 후 본부를 찾은 임채승 단우로부터 애환의 상봉기를 들어봤다.
상봉한 북측 가족이 사촌 형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신지요?
올해 여든 셋인 사촌형님(임채환-충남 서천군) 입니다. 큰 아버지의 장남이며 나하고 세 살 차이라서 유년시절 추억이 많아요. 형님은 6.25때 인민군이 고향인 서천군을 점령하고 나서 의용군을 모집했을 때 참여하셨다고 해요. 그 때 고등학생이었죠. 당시 서천의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지원해 대전을 거쳐 북쪽의 산맥을 타고 평양으로 가서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세에 인민군이 된 형님은 30세에 제대하였고, 제대 후 공산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여 관리꾼으로 생활했다고 합니다.
2차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봉의 일정과 분위기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2월 22일 속초 한화리조트에 집결하여 2시간 정도 방북교육을 받고, 다음날 오전 북측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상봉장소인 금강산 호텔에 도착했어요. 그날 1차 단체상봉과 남측에서 주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했죠. 24일에는 개별상봉과 공동중식이 있었어요. 25일 북측에서 제공한 조식 과 작별상봉을 마지막으로 귀환하였죠. 2박 3일 동안 단체상봉과 개별상봉 4차례의 상봉이 있었어요. 야외상봉은 날씨가 추워서 진행하지 않았고요. 매 상봉마다 눈물바다였죠.
단체상봉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단체상봉은 남측과 북측 기자, 적십자 직원과 안내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였죠. 단체상봉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죠. 북측 기자들이 우리를 찍자 형님께서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시더라구요. “북에서 잘 살고 있다. 잘 살고 있어.” 마음이 안쓰러웠어요. 단체상봉에서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어요. 65년 만에 처음 보는 순간이라서 많이 긴장하고 복받쳐 오는 감정에 눈물만 흘러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죠.
그렇다면 개별상봉에서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었나요?
아무래도 개별상봉은 호텔방에서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자유롭게 진행되어 깊은 대화가 있었죠. 그 때 준비한 선물을 건넸고요. 우리 가족이 준비한 선물은 초코파이, 라면, 김 등 식품류와 비누, 화장품, 샴푸 등 생필품, 감기약, 소화제 등 약품과 겨울내복, 오리털 잠바, 손목 시계였어요. 선물크기의 제한이 있어서 더 많이 준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죠. 다음날 선물을 평양으로 보내는 데 북측 안내원이 오리털 잠바의 상표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떼겠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준비해 간 사진과 족보를 보면서 고향과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형님은 살던 고향과 저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가 외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홀로 산넘어 초등학교에 다녔던 옛이야기를 말씀하실 때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형님이 어떻게 사는지를 들을 수 있었어요. 형님은 홀로 월북하여 고향 생각에 외로울 때가 많았다고 해요. 다행히 처가의 도움을 받아 편안히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형님은 27세에 결혼하여 아들 5명을 잘 키웠고 손자, 손녀가 9명이 있어요. 형님은 회갑 잔치 때 가족사진을 보여주셨어요. 저는 형수님을 못 뵈어 대신 편지로나마 인사를 드렸어요. 형님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상봉에 가장 안타까웠던 시간은 언제였나요?
작별상봉 이동 중에 현관 유리문에 부딪혀 의무실에 가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 보다 북측 상봉단을 태운 버스에 늦게 도착하여 형님이 “우리 채승이 어디 갔어”라며 저를 몹시도 찾으셨다고 해요. 응급치료를 마치고 형님을 태운 버스에 갔어요.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형님 손을 꼭 잡았지요. 2~3분 정도 형님을 볼 수 있었어요. 2~3분이 어떻게 흘렀는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고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요. 이게 못내 아쉬웠는데 그래도 얼굴을 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 싶어요.
참가 후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형님의 말로는 이산가족이 천 만 명이라고 해요. 형님이 아는 북의 이산가족만 말하는 건지, 남과 북을 합쳐서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참 마음 아픈 일이에요. 나는 형님을 65년 만에 본 것이에요. 65년간 형님의 생사를 알 수 없었죠. 저는 그나마 죽기 전에 형님을 만났지만 다른 이산가족들은 생사를 모르는 체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임채승 단우는 인터뷰를 마치고 짧은 시를 주며 이게 내 소감이라며 말을 아꼈다.
눈 덮인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나무마다 눈꽃이 활짝 피었네.
밭에도 눈, 논에도 눈 온천지 하얀 눈. 꿩 한 쌍 먹이 찾아 눈 위를 걷고 있네.
눈 쌓인 길가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인민군, 눈 쌓인 비무장지대 넘어야하는 겨레의 아픔.
맑고 깨끗한 흰 눈처럼 사랑 사랑 가족사랑. 겨레사랑. 다투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
『2014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 중에서
부녀상봉의 오열과 응급실 상봉 등 안타까운 사연 속에서 설계기 이산가족 상봉이 끝났다. 이번 상봉은 적잖은 과제를 남겨 과제를 풀어내려는 지혜의 노력이 시급하다. 우선 상봉 가족의 노령화다. 임채승 단우의 경우에도 사촌 형님의 나이가 83세로, 이번 2차 북측 상봉단도 88명 중 80대 이상이 82명으로 그 비율이 90%를 넘는다. 이는 지금의 이산가족 상봉단 선정 방식이 추첨이 아닌 고령자 우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여러 차례 눈시울이 젖은 임채승 단우의 모습에서 하루 빨리 이산가족상봉의 정례화 되고 서신 교환이나, 전화통화, 화상 상봉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인 왕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산가족의 그리움이 그들만의 그리움이 아니길 사회적인 분위기와 합의가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