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롭게 규명된 흥사단 창립 경위
도산 안창호는 1912년부터 자신이 국내에서 창립했던 청년학우회를 미주에서 재건하기 위해 송종익, 강영소·하상옥·정원도 등의 동지들과 흥사단의 창립을 구상했다. 도산은 홍언을 창립 실무를 이끌 중심 인물로 내정하고, 창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13년 4월 홍언의 추천에 의해 강영소를 발기인회 찬무원(후에 주무원으로 변경)으로 선정하여 세부적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의 강영소 댁(1914 Lyon St. San Ca)에서 안창호·하상옥·정원도·강영소·홍언·양주은 등 6인이 흥사단 창립 발기인회를 개최하고(민병용, P.25~27), 임시규정을 채택했다. 또한 도산을 전권위원으로, 정원도를 주무원으로, 강영소를 주무원 대리로 선정하고 하상옥(단우번호 1번)와 강영소(단우번호 2번)가 입단했다. 그리고 정원도가 1913년 8월 솔트레이크로 이주한 후 강영소가 주무원이 되어 창립에 관한 실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도산이 주관하는 입단문답과 입단(서약)식을 거행하여 1913년 7월 12일 단우 수가 25명에 달했다. 이에 임시규정 제8조(발기인 25인 이상에 달할 시에는 창립위원을 선정하여 본단 설립에 관한 중대사건을 의정함)에 의거하여 ‘창립위원의 의회’(창립위원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창립위원회를 개최할 장소 1곳을 정하되 로스앤젤레스(강영소), 샌프란시스코(하상옥)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는가 하면 하와이의 요인들과 먼저 의논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창립위원회 개최가 미루어지는 가운데 1913년 11월 6일 이일·윤지한이 서약함으로서 단우 수가 40명에 이르자 발기인회 주무원 강영소는 11월 22일 창립위원 선정 조건을 반포하고 각 단우(40명의 발기인 전원)가 각 도(충청도 제외)에 한 사람씩 ‘표천’(투표로 추천)하여 11월 30일 이내에 단 사무소에 도착하도록 통첩했다.
1913년 12월 20일, 창립위원 선정을 위한 투표지 접수, 개표가 완료되자 강영소 주무원은 8도 대표로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민찬호(황해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김홍균(평안도), 송종익(경상도) 등 충청도 대표를 제외한 7명의 창립위원이 피선되었음을 정식으로 반포했다. 후일 황해도 대표 민찬호는 김항주로(시기 미상), 평안도 대표 김홍균은 강영소로(1927년으로 추정) 변경되었다.
7명의 창립위원회는 곧 홍언을 창립위원장으로, 강영소를 주무원으로, 양주은을 재무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914년 6월 8일 안창호를 임시이사부장으로, 이일·송종익·강영대를 이사부원으로 선출하고 7월에는 조병옥을 충청도 대표 창립위원으로 선출했다. 조직과 운영체제가 자리를 잡음에 따라 흥사단은 1914년 12월에 흥사단대회를 제1회 남방대회(19일, 클레어몬트)와 제1회 북방대회(날짜미상, 새크라멘토)로 나누어 개최했다.
한편, 도산이 흥사단 창립을 준비하며 구상했던 흥사단 약법(초안)은 1915년에 비로소 제정되었다. 그해 8월경에 흥사단 약법 기초위원 안창호·강영대·곽림대 3인이 클레어몬트학생양성소에 가서 일주일간 음식을 자취하여 먹으면서 토론하고 연구하여 흥사단약법과 행정세측 안을 작성하여 완성한 것이다.
<참고자료>
곽림대(1968), 「제6부 안도산」, 『도산안창호전집』제11권 전기Ⅰ(2000),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민병용(1986),『미주이민 100년』, 한국일보사출판국.
안창호, 홍언, 강영소, 하상옥, 정원도, 황사용 등이 1913년에 주고받은 서한(첨부자료 참조)
흥사단사편찬위원회(1964),『흥사단오십년사』, 대성문화사.
흥사단운동70년사편찬위원회(1986),『흥사단운동 70년사』, 흥사단 출판부.
흥사단100년사위원회(2013), 『흥사단100년사』, 사단법인 흥사단.
- 글 : 박화만(흥사단 100년사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