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은 창립 10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흥사단 창립 초기의 기록과 자료들을 취합할 목적으로 2012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을 탐방하였습니다. 이 글은 본부 정책기획국 문성근 국장이 탐방기간 중 6월 14일 ~ 16일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앞으로 3회에 걸쳐 뉴스레터에 게재할 계획입니다.

‘도산과 흥사단의 발자취를 따라’ 제1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페리빌딩(Ferry Building)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페리빌딩(Ferry Building)은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1908년 3월 23일, 친일 언동을 일삼던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슨(Durham W. Stevens)을 저격한 장소이다. 이곳은 Market St.와 Embarcadero St.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부두의 여객터미널로 1898년에 건축되어 샌프란시스코 관문 역할을 했다.

<페리빌딩(Ferry Building)> <페리빌딩 앞, 스티븐슨이 저격된 장소>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친일 언동을 일삼던 스티븐슨이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리자, 교민들은 숙소를 찾아가 항의했으나 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교민들의 항의를 받은 스티븐슨은 신변을 위험을 느끼고 서둘러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잠복해 있던 전명운, 장인환 의사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전명운 의사가 먼저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전명운 의사가 총신으로 스티븐슨으로 공격하던 중, 장인환 의사가 총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 사건으로 스티븐슨은 사망했다. 정명운 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 의사는 2급 살인죄(개인적 원한으로 살인하는 경우 1급 살인죄에 해당되어 처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게 되나, 민족·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거사였기에 2급 살인죄를 언도 받았다고 한다.)로 25년형을 언도받고 알카트라즈 감옥에 복역했다.(1919년 모범수로 석방)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후원회를 조직하고, 하와이와 멕시코, 중국 등지에서도 후원금 총 740$ 가량 모금하는 등 한인사회를 하나로 집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1909년 북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로 출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교민들은 정확한 변호를 위해 이승만을 통역자로 추천했으나, 이승만은 교인으로서 살인을 범한 사람을 변호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1903년 9월 안창호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들이 모여 가정예배를 보면서 교회창립의 기초를 다져, 1905년 10월 상항한인감리교회가 창립되었다. 같은 시기인 1903년 9월에 도산 안창호에 의해 교민단체인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샌프란시스코 거주교민이 증가함에 따라 1905년에 개편하여 공립협회가 되었다. 공립협회는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발간했으며, 1909년 2월에는 <신한민보>로 개칭하여 발간했다.
처음 교회는 캘리포니아 St. 2350에 위치했는데, 3층의 개인주택을 임대해 사용했다. 스티븐슨을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도 이 교회의 창립교인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강도 8.3에 달하는 대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파괴되자 교인들은 오클랜드에 숙소를 얻어 임시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 현지 일본 영사는 조선 통감부에 보고하여 4만환을 지원받아 교민들을 지원하려 했으나, 교민들이 거부했다.
1911년 여름에는 Bush St. 2123으로 이전했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이전을 하다가 1930년 6월 교인들의 힘으로 포웰 St.에 교회건물을 신축하였다. 1924년에 안창호 선생이 이 교회에 다시 방문하자 환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편 안익태도 이 교회에 방문했는데, 교인들이 태극기를 걸어놓고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감동받아 애국가 작곡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교회의 건물은 공립협회, 국민회 사무실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남다르다.
이후 교회 건물은 1995년 중국인에 팔려 중국인 절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현재 교회는 1994년 5월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유다 St. 3030에 신축되었다.
초대 담임 교역자인 양주삼 전도사는 한글로 된 월간잡지 『대도』( ‘그리스도의 길’이란 의미로 월 1천부를 발간했으나,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1912년 8월에 폐간되었다.)를 창간하였다. 1909년 12월에 윤병구 목사가 2대 담임으로 부임하고, 1911년 2월에는 이대위 목사가 3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한인 최초의 UC 버클리 졸업생인 이대위 목사는 공사업무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한글 식자기를 개발하여 신한민보를 펴내는데 기여했다. 이 목사는 흥사단 창립당시 축도를 하기 위해 참석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대를 메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이는 사진 모두 흥사단 모임 사진임
※ 교회 ‘역사복원위원회’의 한 장로님이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에 설명을 해 주었는데, 흥사단이 창립한 곳을 이 곳 교회로 소개했다. 하지만 강영소 단우의 집에서 창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도산 선생이 교회가 설립되는데 기여를 했고, 많은 교인이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교회의 역사를 담은 사진에 흥사단 모임 사진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 흥사단과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영소(단우번호 2) 집_ 흥사단 창립 장소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강영소 단우의 집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강영소 단우가 살았던 집은 Lyon St. 1914호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 집에 세들어 살았던 양주은의 증언에 따르면, 발기인 안창호, 강영소, 하상옥, 전원도, 홍언, 양주은과 예배를 하기 위해 온 이대위 등 7명이 창립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현재의 집터는 과거의 기록에 따른 추정지이다. 『재미한인사략』(노재연),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등에는 흥사단이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인 Perry Ave. 232호에서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장규식(중앙대) 교수는 창단을 강영소 집에서 소박하게 하고, 그 뒤 국민회총회관에서 기념식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 사전조사에서는 주소지가 Lyon St. 1914호였는데, 탐방단이 간 곳의 주소는 1912호였다. 현지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주소지가 몇 차례 바뀌었다고 한다. 실제 옆집의 주소가 1908호인 것으로 보아 재건축되는 과정에서 주소지가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 글 : 문성근(본부 정책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