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동주> 포스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위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자취방의 비내리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에서 나즈막히 읊조려진 시 , '쉽게 씌어진 시'의 구절들이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의 시 구절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동주의 삶 속에서 되살아난다.
중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많은 윤동주의 시들을 배웠지만,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는 바로 이 <쉽게 씌어진 시>였다. 이 시 안에 영화 속에 나타난 동주의 복잡한 심정들이 모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에 조선인으로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 둘도 없는 벗 몽규의 조선 해방 투쟁을 위한 거침없는 행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 그럼에도 가슴 한 켠에는 조선의 독립을 꿈꾸고 있는 자신.
<동주>는 치열하게 갈등하고 고뇌하는 청춘, 그리고 윤동주와 송몽규의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제애를 다룬 영화이다. 그러나 동주와 몽규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던 만큼 그들의 보이지 않는 갈등 또한 깊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문예지 발간을 위해 좁은 방에 다같이 모였을 때 둘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이 그 갈등을 잘 보여준다.
투쟁 의식 고취와 학생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서 문예지 발간 작업을 주도했던 몽규와는 달리, 동주는 오로지 순수한 마음으로 시문학을 사랑했다. 그깟 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몽규도 사실 동주와 동주의 시 그리고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사랑했기에,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없었다.
반면 동주는 가슴 속에 조선 해방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품은 열혈 청년 몽규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내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했다. 무엇이든 자신보다 뛰어났던 몽규에 대한 열등감과 그를 닮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내적 갈등 속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윤동주가 쓴 시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바로 '부끄러움'이 아닌가 싶다. 왜 이런 시대에 태어나서 시인이 되겠다고 했을까 한스러웠던 동주는, 왜 자신과 함께 하자고 말하지 않느냐고 몽규에게 물으면서도 결국 펜을 놓을 수 없었다.
송몽규의 거침없는 행보는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윤동주의 삶은 그 스스로도 부끄러워했듯이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은 청년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다독이듯 말해 준다. 이 말은 어쩌면 정지용 시인의 입을 빌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자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윤동주의 시가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시어들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우리와 심정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주는 몽규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계속해서 갈등하고 또 고뇌했다. 자신의 역할을 고민했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끊임없이 반성했다.
'어쩌면 송몽규가 있었기에 그런 시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같은 곳에서 나고 자라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어온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끔 해준다. 윤동주와 송몽규, 그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영화 후반부 일본 고등형사가 윤동주와 송몽규를 각각 심문하면서 나눈 언쟁들이 교차되는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형사가 거짓 진술서에 서명을 강요하면서 문명인과 비문명인, 국제법, 합법적인 절차를 운운하며 구구절절 얘기했을 때, 나는 그가 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반면 그 장면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청년 정신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몽규는 형사의 말에 일침을 가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열망 속에 숨겨진 일본의 '열등감'을 폭로하였고, 동주는 서명을 강요하는 형사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진술서를 찢어버린다.
영화는 청년 윤동주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 반문했을 때야 비로소, 부끄러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반성'임을 알 수 있다. 왜 부끄러운가? 무엇이 부끄러운가? 동주는 송몽규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고 나자 일제의 폭압에 맞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동주는 심문 중 고등형사에게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반성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이것이 우리가 청년 동주에게서 배워야할 점이 아닐까.
- 글 : 권형랑(흥사단 청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