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주체는 맥락 속에서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명료하게 천명했다. 맥락은 역사다. 사람의 운명은 시대와 우여곡절을 겪는다. 주체의 역사적 자각은 그래서 중요하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에 관해 공부를 하다보면 수많은 역사 인물을 만나게 된다. 도산이 좋아한 인물도 많고, 도산을 좋아하는 인물들도 많이 있다. 물론 도산을 적대하는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역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것이 체계적으로 쌓이면 역사가 된다. 도산의 인격이 ‘애기애타’로 완성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과 사람들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고향 사람들 이야기다. 도산의 고향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누구였을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당 임기반 선생을 꼽는다.
근대화 필요성 자각
근당의 원래 이름은 임형주다. 1867년 5월 5일 용강군 정화리,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는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아호가 槿堂이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로 고향에 내려왔다. 근당은 문벌타파, 계급타파를 주장했다. 그는 1894년 개화를 주장하면서 스스로 양반의복을 벗고 실용적인 평민의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잘랐다. 그리고 감리교에 입교하여 전도사로 활동했다. 근당의 할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그를 용강에서 쫓아냈다. 근당은 진남포 뱃고지로 이사했다. 그는 청일전쟁을 겪은 후 자비를 털어 용강에 선돌감리교회를 세우고 민권사상 보급과 전도 사업에 열중했다.
1897년 독립협회에서 시작된 만민공동회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 근당의 사랑방에는 지역 청년들과 유지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독립협회와 토론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도산은 평양지부 결성 과정에서 지역 청년들과 인맥을 쌓게 된다. 이강, 임준기, 안태국,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이 그들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에 해산되었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남았다.
평양지역 청년들의 미주 이민 조력자
1903년, 근당은 진남포 인력개발회사 관리가 되어 평양지역 청년들이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도산이 1902년 도미 유학을 떠난 이후의 일이다. 동갑나기 이강이 제일먼저 이민 배를 탔고, 이어서 임준기, 임치정, 송석준, 김성무, 이암 등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왔다. 임준기는 근당과 친족관계다. 도산은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한인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도산은 공립협회에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청사진을 그릴 때 이강, 임준기와 함께 자유 문명 공화국 수립에 대한 비전을 수립했다. 대한인신민회 취지서를 작성하고, 통용장정에 담길 조항을 의논하려면 비공개 회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산페드로항에서 하와이로 가는 s.s.소노마호를 탄 도산>
대한인신민회와 신민회
신민회라는 명칭은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미 ‘호놀룰루신민회’라는 명칭으로 조직이 결성된 바 있었다. 초기 이민자들이 동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조직한 단체이고 여기에 근당이 있었다. 이강과 임준기는 이 소식을 도산에게 전한 것이 분명하다. 도산은 공립협회원동(대한)지부 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대한인신민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호놀룰루신민회는 계파갈등으로 1년 만에 해산되었다. 新民이란 개념은 이미 독립협회 시절부터 근당선생과 통하던 개념이다. 여기에 중국의 양계초가 들고 나온 민족자강에 공속되는 신민설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도산은 1907년 귀국하여 자강주의의 국가형성론에 주목하고 있는 자강파 개혁인사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나갔다. 양기탁, 신채호, 임치정 등은 언론계고, 이동녕, 이동휘, 이갑, 유동열 등은 군인출신이다. 상동교회의 진보적인 청년들도 있었다. 이들은 군인출신이거나 교회인사들 그리고 언론인들이다. 도산의 비전은 민권우선의 新民의 공화국이다. 도산은 합법성을 띤 청년학우회를 통해 자유 시민을 훈련하고자 전략을 수립했다. 청년학우회에는 주로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인물들이 호응했다.
한국재림교
다시 근당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근당은 1903년 이민자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하와이로 와서 1년 남짓 머물렀다. 그리고 1904년 5월, 소환요청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근당은 일본 고베에 도착해서 고민에 빠졌다. 사실은 구속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근당은 마침 배에서 손흥조를 만나 재림교의 교리를 들었다. 그는 감리교인 이었으나 위기 상황에서 재림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기반으로 지었다. 基磐이란 이름은 베드로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근당은 임기반이 되어 한국재림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교단의 후원으로 의료, 학교, 출판 등 선교사업을 벌였다. 근당의 국민교육 철학은 지, 덕, 체의 삼육이다. 근당은 친구들을 재림교로 불러들였다.
도산의 장인 이석관은 의명학교(삼육학교) 교사가 되었고, 도산의 동서 김창세의 아버지 김승원은 출판사업(시조사)을 맡았다. 김창세는 성장하면서 교단의 장학금으로 세브란스의학원을 졸업하고 평양순안병원(서울삼육병원)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지인들 대부분 근당의 권유로 재림교에 입교하게 된다.
5년 동안 재림교단은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마침내 선교본부를 서울로 이동하려 할 때 근당은 이를 반대했고, 재림교단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근당은 1932년 6월 초, 자녀들이 유학 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서거했다. 1937년 말, 도산이 경성제국대학병원(서울대병원)에서 입원해 있을 때 근당의 딸, 신덕과 신일이 찾아왔다. 도산과 근당의 가족은 돈독한 관계였던 것이다. 정재용, 김구, 김붕준, 이병훈, 정동심, 최태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재림교인으로 활동했다.
- 글 : 이은숙(흥사단교육수련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