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은, 김태석 단우를 비롯한 원로 단우 9명은 11월 16일(화)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어 계신 나정(蘿井) 박현환(朴賢煥) 단우 묘소를 참배했다. 원로 단우들은 청년 시절 접했던 박현환 단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5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다. 상해임시정부 시기부터 흥사단을 위해 40년 이상을 헌신했던 박현환 단우를 12월 18일 기일을 맞아 소개하고자 한다.
박현환은 1891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신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문,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이름자의 음만 바꾸어 박현환(朴玄寰)이라고 쓰기도 했으며, 호는 나정(蘿井)이다. 박현환 단우는 16세 되던 1906년 3월에 정주로 가서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중등 과정을 수료한 뒤, 1912년 평북 곽산의 남산중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1913년 3월부터는 경남 마산의 창신여자중학교 고등과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서 한결 김윤경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후 오산중학교에 봉직하던 중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인사 중 최남선이 남강 이승훈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현상윤을 통하고, 현상윤이 김도태에게 연락하자 때마침 김도태의 집에 머물던 박현환이 그 임무를 받아 선천에 가 있는 이승훈에게 연락하기에 이른다. 3·1운동 뒤 국내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잠입하였다가 그 길로 곧장 상하이로 갔다. 박현환은 1919년(28세)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원 조사과 과원, 독립운동사 자료편찬위원으로 봉직하였고, ‘신한청년’지와 ‘독립신문사’ 기자로 활약하였다. 박현환은 원동임시위원부에서 도산의 직접 지도하에 1920년 5월 6일 흥사단에 입단(서약)하였다.
1922년에는 수양동맹회 창립위원으로 수양동우회를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1937년(46세) 6월에 동우회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날에는 단의 사무소를 자신의 자택에서 을지로2가 199번지 한국공인사(옛 대성빌딩)로 옮기고, 그해 12월 18일 부산으로 피난할 때까지 거의 홀로 단 본부를 지켰다. 부산 피난에서 돌아와서는 대성빌딩 구내 움막 같은 처소에서 생활하면서 건물을 보살폈다. 특히, 1958년 5월 흥사단 대성빌딩을 재건하는 데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1955년에는 ‘흥사단 운동’을 편저하여 흥사단 운동의 확산에 전력하였다. 박현환은 본부를 국내로 옮겨온 이후 72세의 노령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흥사단의 모든 실무를 총괄하면서 고락을 같이했다. 1963년에 열린 제50차 흥사단대회에서 그의 공로를 기려 감사장을 수여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입단한 이후 40여 년간 성실히 단무에 헌신한 공로에 대해 흥사단과 단우들의 마음을 남긴 것이다.
2021년 11월에 박현환 단우를 만난 소감은 늦가을의 햇살처럼 온화하고 평온했다. 그분이 남긴 참된 나라사랑과 흥사단 활동이 마음에 먼저 와닿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새로운 정보는 홍수처럼 다가온다. 이러한 가운데 흥사단 단우가 기억해야 할 역사와 가치는 박현환 단우가 몸소 실천한 진정한 주인 정신이라고 대학로 단소를 들어서며 생각해본다.
글 : 정책기획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