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박철성(수원·용인흥사단 부지부장)
시인 김춘수님의 ‘꽃’의 의미를 상기할 때 ‘독도’만큼 국민들에게 의미있는 섬이 또 있을까 싶다.
수원·용인 흥사단의 울릉도·독도 탐방 일정이 6월 19일에서 22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정해지고 나서부터 마음은 벌써 설레었다. 마음이나 머릿속 한 곳에만 ‘우리 고유의 영토’로 고유명사화되어 자리잡고 있는 독도에 직접 발걸음한다는 것은 여느 국내외 여행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독도영유권의 억지 주장을 자국의 방위백서에서까지 주장하고 있는 현실과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진실과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된 역사인식에 기반하여 반성할 줄 모르는 작태들에 대한 당당한 항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단 본부에서도 대일행동특별위원회와 독도수호본부가 주관하는 독도방문단을 모집하고 있었고, 6월 28일부터 독도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관리위원회 회의참석으로 단 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개인 면담에서 조성두 이사장님이 수원·용인지부의 독도 방문을 기뻐하셨고, 수원·용인지부가 대일행동특별위원회의 독도 방문의 선봉대가 되어 주길 바라는 당부 말씀과 함께 현수막과 성명서 지원도 해주시겠다는 약속은 더 큰 의미를 갖게 하였다. 실제 이사장님은 지부의 독도 방문 일정이 시작되기 전이나 끝마친 이후에도 이갑준 사무총장 대행을 통해 꾸준히 격려와 관심을 주셨다. 최종 9명으로 구성된 방문일행은 19일 1차 목적지인 강릉으로 출발하였다.
강문해변에서의 모래사장 걷기, 안목해변에서의 차담회 등 회원들의 여유를 위해 좋은 시간이었다. 일반 시민이 네 분이 함께하는 일정이었기에 흥사단 수원·용인지부가 진행하는 행사가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 참여단우들도 같았었는지 모든 단우들이 참여한 시민분들을 친절함으로 소통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울릉도를 향하는 배편에 올라탔고, 도착한 울릉도 저동항은 무척 무더운 날씨였다. 도착 이튿날 일행들은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울릉도 일주 여행에 참석하였다.
울릉도 여행경험이 있는 분들이 전해준 말처럼 소형버스 기사분이 운전기사 역할과 가이드 역할을 함께 해주시는 구조였다. 눈으로 보여지는 울릉도의 천혜의 경관들이 저토록 훌륭하고 경탄스러운데도, 큰 숨 한껏 들이켜고 음미하듯 천천히 내뱉는 감상도 못하고 울릉도라는 기억 폴더에 차곡하게 넣는 여유마저 가지지 못한 채 차에 쫓기듯, 사람에게 독촉하듯 내렸다 올라타는 순간들이 적지 않게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울릉도가 훌륭하고 볼 것 많고 새로운 애착이 드는 섬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주목받은 ‘국민 섬-동생 독도’에 가려 멋진 형 대접을 못 받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될 만큼 다시금 찾아오고 싶은 섬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일행들에게 무엇보다 제일 큰 관심사는 독도로 가는 배가 당일 출항할 수 있는가 하는 여부였다. 일행 중에는 두 번 다 입도를 못하고 이번 독도방문이 세 번째이신 분도 계셨고, 나는 나름대로 입도해서 독도 관련 현수막을 펼치고 간단한 성명서를 낭독하는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 마음이 컸기에 여행사 가이드만 볼라치면 계속해서 독도 날씨는 어떤지 파도 높이는 어떤지 바람세기는 어떤지 온통 관심사가 날씨와 바람, 파고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답변은 빙긋이 웃으며 그날 되어 봐야 안단다.
어느 순간부터는 바람만 조금 불어도 내 눈은 파도를 살피고 비가 내려도 고개 돌려 파도를 바라보게 되었다. 울릉도에 온 이들 모두가 입도를 그날의 운에 맡기니 출항하느냐 못하느냐, 입도하느냐 못하느냐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일행들과 나름 유익한 시간으로 채우는 것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음식도 좋은 평이 나올만한 곳을 찾아보려 살폈고, 카페에서 차 한잔하더라도 괜찮은 곳으로 안내하려 검색을 넘어서 미리 뛰어가서 메뉴를 살피기도 하였다. 울릉도 숙소에서는 저녁에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으려 야경을 보러 나가기도 하였었다.
드디어 독도출발 전날, 오후에 가이드에게서 전화가 왔다.
‘독도 갈 배가 강릉에서 안 뜬다고 하네요’, ‘파도가 높아서요’
독도방문 일행들에게 착잡함을 꾹꾹 욱여넣은 심정으로 소식을 전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다들 이해는 하였지만, 표정들을 통해서 서운함을 역력하게 볼 수 있었다. 결국, 독도는 아니지만 울릉도에서라도 현수막과 태극기를 들고 일본의 야욕과 독도 망언을 규탄하는 현수막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외칠 것은 외치고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한다는 마음들에 참으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사한 결정이었다.
모두 독도로의 출항 불가로 대체된 프로그램으로 도동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첫 일정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독도전망대로 올라갔다.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독도모형 구조물 앞에서 일행들은 나란히 섰고, 현수막을 펼치고 태극기를 손에 모두 들었다. 나는 연신 카메라를 눌렀다. 구조물에는 독도가 있었고, 그 앞에는 독도지키미들이 있었다. 렌즈를 통해서 들여다 본 그분들의 얼굴에서, 전망대를 내려오는 모두의 얼굴에서 육지 땅과 울릉도와 독도의 구분은 이미 없어 보였다. 어느 시간이든 어느 곳이든 마음속 애정을 담은 영토사랑만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강릉으로 되돌아가는 일행들을 실은 배가 떠나갈 때 여러 번 단우들에게 다짐같은 약속을 했었다. 남은 4일 동안 벼르고 벼르다가 독도에 입도하게 된다면, 함께 한 여러분들을 생각하며 독도에 발걸음을 하겠노라고.
배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 65리터와 30리터 배낭을 메고 안으며 울릉군이 운영하는 ‘국민여가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남은 나흘간의 일정은 텐트를 치고 지내며 오랜만에 야영을 하려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울릉도 곳곳을 다니면서 걸으며 보고, 앉아서 보고, 때론 한없이 멍하니 보길 바라는 마음이 컸었다. 2시간이나 3시간에 한 번 온다는 해안도로 일주하는 버스를 알차고 빠른 간격으로 이용하는 방법의 노하우도 알게 되었고, 울릉도를 버스로 관광할 때는 잠깐씩 들렀던 곳들의 아쉬움도 한참의 시간을 두고 긴긴 숨으로 읽고 살피고 안아 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울릉도 캠핑장에서 바라본 하루하루의 석양들은 전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것과도 같아서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그려질 것 같아 인상이 깊었다. 그렇게 나만의 울릉도를 느끼는 와중에도 독도를 향한 조바심은 한시도 떠날 줄은 몰랐다.
매일 여객항과 여행사 가이드에게 내일 예상되는 바다 날씨와 출항 여부를 확인했었고, 출항한 여객선들이 입도를 하였는지 독도만 바라보다 돌아왔는지 체크하느라 전전긍긍하기도 하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울릉도 홈페이지를 독도 출항알림서비스를 보기 위해 앞으로 또다시 그토록 많이 들여다볼 일이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들여다보았다. 여객항 안내와 여행가이드, 울릉도 토박이 식당 아주머니가 추천하고 날씨가 괜찮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아 준 24일(토)로 배편을 마련하였다. 긴장한 채로 텐트에서 이틀째 밤을 맞았다.
너 보란 듯이 날씨는 따가웠고 파도는 잔잔했다. 배에 배낭을 싣고 승선하였다. 출항하는 배에 올라타서 독도로 향한다는 감상도 잠시, 무엇보다 입도를 하게 될 경우를 상정해서 20여분의 짧은 시간동안 홀로 진행해야 할 것들을 정리부터 하기 시작했다. 400여명의 독도 관광객들이 저마다 짧은 시간 동안 기념사진을 찍으시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서 준비해 간 현수막을 독도의 배경이 좋은 곳에 걸어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야 할 것이고, 태극기와 흥사단기를 번갈아 가면서 든 채 각각 사진 촬영도 해야 할 것이기에 주위 분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독도경비대의 도움을 받아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인파는 주어진 20분 동안 촬영 포인트마다 그룹으로 기다리는 중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에게 촬영을 바라는 분들이 제법 많았다. 주변 분들을 상대로 선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흥사단 소개, 일본의 독도야욕과 역사왜곡 사항, 뉘우칠 줄 모른 채 자행되는 제국주의 회귀본능에 가까운 일본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2분여 정도 외쳤고, 흥사단의 대일행동을 지지해 주십사하는 부탁과 이에 동조하시는 국민들께서는 함께 촬영하길 희망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관광객들께서 자신들에게 작은 태극기를 나눠 줄 것과 더불어 현수막을 설치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아! 이분들도 같은 마음으로 오셨구나’라는 생각에 한없이 뭉클해지고 감사함이 내 안에서 올라왔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대한민국 만세!’도 ‘독도는 우리 땅!’도 함께 제창하고픈 마음이었다.
사실 입도한 후 독도를 카메라에 담을 겨를도 없었고 찬찬하게 우리의 독도를 바라볼 여유는 없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독도라는 우리의 공간에서 저마다 감격스러워하며 감탄사와 함께 독도와 일체 되려는 얼굴과 몸짓들은 역력히 느낄 수가 있었다. 잊을세라 함께 독도에 발걸음을 딛지 못한 병실의 지부장님, 일곱 분의 독도방문 일행들의 얼굴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술에 담기도 했다.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지금도 유일하게 지리적 위치를 알고 있는 섬 독도.
기온, 강수량, 주요 해산물, 역사적 기술, 어린나이에 가늠도 안 되는 뱃길 거리를 가사로 암기한 섬 독도.
가수 서유석이 ‘홀로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 아프디 아픈 정서를 대변한 섬 독도.
뚝심 있게 먼 곳에 홀로 있어도 나라 끝을 지키는 변방의 장수처럼 우뚝 솟은 섬 독도.
혹,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이 섬을 지나가시다 애정을 담아 당신께서 호를 지으셨으면 ‘도산’이 아니라 ‘독산’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섬 독도.
돌아오는 배에서 한 닢 잠도 못 이루고 ‘다시 보러 올 날이 있겠지’하며 혼잣말로 묻는 기억의 섬 독도.
그 기억이 독도에 대한 많은 기억의 시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독도를 떠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