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박만규 (흥사단 고문·전남대 명예교수)
현 정부가 출범한지 1년 반이 지났다. 1% 미만의 근소한 표 차이였지만 엄연히 여야 간 정권 교체였으므로 각 분야에서 정책의 변화가 뒤따르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단지 정책들 수준의 변화가 아니라 국정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힘겹게 이어져 오던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고 그 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남북 간 불안정성이 크게 높아졌다. 주변 4강과의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대격변이 일어났다. 미국과 일본에는 거의 예속적이라 할 만큼 무조건 밀착하는 대신 중국과 러시아와는 소원해지다 못해 심각하게 반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특히 대일 관계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강제징용 배상문제의 처리, 일본의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에 대한 적극적 용인, 군사적으로는 그 동안의 터부를 깨고 동맹에 버금가는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저돌적 행태를 보여 많은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국익 우선의 실용 외교와는 동떨어진 채 다수 여론의 반대를 무릅쓴 일본 편향의 일방적 드라이브에 그 연유가 무엇인지 모두 의아함마저 느끼고 있다.
이는 단지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단순성 등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보다 근원적인 배경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모든 상황 전개가 현 정부의 잘못된 역사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 들어 논란이 되어온 다음 몇 가지 이슈와 행태를 되짚어 보자.
첫째, 가장 최근에 드러난 사례로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교정에서 퇴출하겠다는 사안이다. 반대 여론이 훨씬 많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하등 이득이 될 수 없음에도 굳이 이를 강행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초에는 독립전쟁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 5인(이회영·홍범도·지청천·김좌진·이범석)을 전부 철거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여론의 반대에 밀려 일단 홍범도 장군 1인으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그 표면적인 이유는 홍장군이 레닌을 예방해 권총을 선물로 받았고 뒤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전력이 있다고 하였다.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육사에서 기리기에는 이른바 이념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기가 찰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대만에서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 중국의 혁명영수 손문이 항일투쟁을 위해 레닌과 손잡은 사실은 어떻게 보는가. 또 2차 대전 말기 루스벨트와 처칠이 스탈린을 만나 함께 협력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라고 배척할 것인가. 참으로 억지 논리로 실은 우리 독립운동 자체를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기념관 건립 등 초대대통령 이승만 현창사업이다. 500억 원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기념관을 민간단체가 나서서 국민성금을 모아 추진하되 부족한 부분은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이다. 형식상 민간 주도이지만 주된 동력이 현 정부에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승만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어쨌든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므로 어떤 개인들이 그를 숭모하고 현창하는 일은 있을 수 있고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고 4.19의거로 또다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인물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국기(國基)인 민주공화체제를 파괴한 독재자를 정부가 앞장서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며 현창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민주공화국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종신 대통령, 즉 제왕을 꿈꾸다 의로운 청년과 학생들의 분노를 사 기어코 살아생전에 그 동상마저 끌려 내려온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일부에서는 역사적 인물의 공과(功過)를 말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공은 너무 미미하고 과는 넘치는 인물이다.
이승만을 추앙하는 이들에게 권고하자면, 이승만을 가장 위하는 길은 그를 그나마 지금 그대로라도 놓아두는 것이다. 그를 자꾸 불러내어 그의 흉한 민낯이 모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실은 그를 가장 위하는 길임을 충고해주고 싶다.
셋째, 지금 당장은 잠잠해져 있으나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여전히 살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강력히 추진하다가 학계와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고 좌초됐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는 뉴라이트 신친일파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 실현하려고 하는 핵심 이슈다.
이미 다 드러났지만, 그 숨은 의도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와 그 시기에 있었던 독립운동이나 친일행적을 아예 다 떼어내 함께 지워 버리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형(天刑)과도 같은 친일파라는 부끄러운 주홍글씨 낙인을 지울 수 있게 된다. 독립운동과는 무관하게 미국이 가져다준 해방으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탄생 되었으므로 누구나 대등한 국민이 된 다음, 한 걸음 나아가 반공을 내세워 대한민국의 건국공로자로까지 나서고 싶기 때문이다. 참으로 역사를 뒤틀어서라도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이 되겠다는 음모에 불과하다.
일견 낱낱의 이슈로 보이는 이런 행태들의 공통된 밑바당에는 무엇이 있는가? 신친일파 세력의 역사뒤집기 음모이다. 지난 80년대부터 일부 학자들이 턱없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들고 나왔고 그동안 거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죽여 왔던 뉴라이트로 통칭되는 신친일파들이 거기에 환호하며 준동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의 친일파와 그들의 혈연적 혹은 정신적 후예인 신친일파들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권력의 인적 세력기반이면서 그 권력을 외피 삼아 연명해 왔다. 그들에게 가장 큰 약점은 역사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반민족세력이라는 굴레였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굴레를 풀어야만 했다. 그래서 때로는 민족 가치를 폄하해 보기도 하고 반공을 내세우고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사이비 이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예 대한민국을 독립운동과 분리시켜 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우리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 사실은 엄연히 헌법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헌법의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중략···)” 라고 말한다. 즉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률적 계승자인 것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8.15 건국절 정립, 건국 대통령 이승만기념관 건립,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들에 대한 폄훼의 공통된 밑바탕에는 신친일파의 반헌법적 역사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국방부 보훈부 등 정부 각 부처가 앞장서 추진하고 있지만, 각 부처의 책임자는 모두 현 정부가 발탁하여 그 역할을 재촉받고 있는 손발들이다. 결국은 현 정부의 잘못된 역사의식이 배후인 것이다. 깊은 통회와 반성을 촉구하며 하루빨리 건강한 역사의식을 되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