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좌우명 자체가 흥사단 정신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문자답하면서 흥사단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화창한 봄날, 김재순 단우의 인터뷰를 위해 흥사단 본부와 가까이에 있는 샘터사로 향했다. 건강해 보이는 김재순 단우는 일행을 반겨 주었다. 이번 인터뷰는 이대형 단우가 질문하고 김태석, 김계태 단우가 참관하였다. 편안한 상황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한 시간 반 남짓 진행되었다.
문 : 선배님은 50년대 초중반까지 단소에서 흥사단 운동을 맹렬히 하셨습니다. 선배님의 인생에서 흥사단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어려운 시절 UN 세계학생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것이 내게는 큰 자긍심이었죠. 하지만 이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이혜련 여사를 중심으로 미주 단우들이 준비한 구호품을 한국으로 가져온 일이에요. 그때 구호품을 받은 동지들은 색다른 감흥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이혜련 여사가 주축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미주 단우들이 정성을 모아 마련한 구호품이니까요. 이렇게 흥사단은 힘들고 어려울 때 동지애를 알게 했죠. 제가 단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이는 흥사단을 떠났다고 하는데 나는 흥사단을 떠난 적이 없어요. 하는 일에 있어서 흥사단 단우로서 일을 했고,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으로 모든 일을 대했죠. 이렇게 나의 인생에서 흥사단 정신은 바탕을 이루는 하나의 획이요, 생활의 연장이었어요.
문 : 선배님께서 하신 흥사단 활동 중에 의미 있는 활동이 많으실 텐데요, 후배 단우에게 소개 좀 해주시죠.
답 : 1년간 맡아 진행한 흥사단 금요개척자 강좌가 기억에 남죠. 금요강좌는 당시로써는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어요. 사회 파급력도 대단했고, 시대의 명사는 다 나왔죠. 자신을 초청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어요. 명사들은 열강하였고, 청중들은 열광했죠. <새벽> 잡지 주간을 맡으며 겪은 일화를 소개하죠. 주간을 맡으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필자 초빙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새벽 잡지를 쓸 만한 자를 섭외하기 위해 신문을 보고, 글 잘 쓰는 기자를 섭렵하였죠. 어느 날 서점에서 이어령 씨의 글을 접했는데 이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당시 이어령 씨가 경기고 교사로 있었을 때, 학교로 연락하여 통화했죠. 이어령 씨는 당장이라도 뛰어오겠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원고 청탁에 대단히 기뻐했어요.
문 : 장리욱 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시다고 들었습니다.
답 : 제가 서약 문답을 장리욱 박사와 2~3시간 동안 했어요. 문답 후, 장리욱 박사와는 서울대 총장이라는 안면도 있었지만, 그분에게는 은연중에 도산의 후계자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도산과 닮은 부분이 많았어요. 기억에 남는 게 도산은 자신의 제자에게도 존칭을 썼는데, 가령 ‘자셨나?’, ‘무얼 하셨나?’ 등인데 도산처럼 장리욱 박사도 그런 말씀을 쓰셨죠. 장리욱 박사는 이렇듯 권위적인데가 없었는데, 자상하고 모든 이에게 친근하셨죠. 이런 장리욱 박사를 후배들은 집안의 아버지처럼 모셨지요.
문 : 장리욱 선생님 외에 다른 선배 단우님과의 인연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주요한 선생의 인연은 아주 각별합니다. 선생과의 만남은 UN 세계학생대회를 마치고 부산 정치 파동 후, 많은 단우들처럼 저 또한 감옥에 다녀왔습니다. 석 달 복역 후 나와 취직을 하려니 전과자 신분으로는 마땅히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때 주요한 선생 곁에서 일을 도와 드렸죠. 당시 주요한 선생께서는 피난 온 신문사와 부산의 국제신문사 등에 사설을 쓰셨습니다. 그때 선생님 곁에서 글 쓰는 방법과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였죠. 또 한 분을 말씀드리면 흥사단의 대들보 박현환 선생입니다. 제가 폐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한 경우가 있는데 선생께서 찾아와 극진히 챙겨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상하신 선생께서는 한사람, 한 사람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문 : 흥사단 후배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한 말씀 부탁합니다.
답 : 죽을 때까지 자문자답하면서 흥사단 정신을 잊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맹약한 그 길을 한결같이 걸어야 할 것입니다.
문 : 선배님의 좌우명이 궁금합니다.
답 : 좌우명 자체가 흥사단 정신입니다. 49년간 샘터를 발행해 오면서 발행인으로서의 기본 철학이 흥사단 정신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으로 임했습니다.
<우암 김재순 단우>
우암 김재순 단우는 1923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52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제5, 6, 7, 8, 9, 13, 14대 국회의원으로 총 7선에 걸쳐 의원직을 역임했으며, 제13대 국회의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샘터사 고문을 역임하고 있으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 인터뷰 및 정리 : 이대형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