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time No see. 제임스! 바빴어.’ ‘하이. 미스 수잔’ 나는 늘 여사님을 미스라고 불렀다. ‘아니야. 나 할머니야. 놀리지 마!’ 깡마른 팔과 손은 유독 길고 커 보였다. 천진한 소녀 같았고 다정했다.
운명하시던 날 아침 식사를 아들과 함께하시고, 11시에 출타하는 아들을 배웅한 후 2시(*)께 주무시듯, 행복하게 떠나셨다고 전하는 딸 크리스틴의 말에 눈물이 배어 있었다.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뒤뜰 처마에서 들려오는 인경소리가 여사님의 쾌활한 목소리로 들린다. 2년 전 백영중 선배의 장례식에서 뵈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제임스. 왜 그리 안 보여.’ 손등을 두드리며 맞이하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몇 해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2003년부터 흥사단 미주위원부 총무직을 맡으면서 여사님을 가깝게 뵐 기회를 가졌다. 혼자로는 과분해 가끔 주변 분과 동행하기도 했다. 여사님을 더 가깝게 만든 것은 도산 선생과 조개 단추이다. 1973년 도산 선생을 서울 망우리 공동묘소에서 지금의 도산공원으로 이장할 때, 시커멓게 타버린 유골 속에서 묻어나온 조개단추에 대한 기고문이다. 주운 5~6개의 조개단추로 미뤄볼 때 일제가 도산 선생의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장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닫기 힘든 산꼭대기. 곡도 없이 염도 없이 병원복에 덮고 있던 마포에 말아 큼직한 석회관(*) 속으로 내던졌던 것이다.
여사님도 가파른 길을 여러분의 부축을 받으며 참석하셨지만, 내가 전해준 조개 단추 얘기는 남달랐던 것 같다. 그 후 나를 지인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도산 선생님의 조개 단추라고 하셨다.(시뮬레이션으로 시신이 놓여진 장면을 그려놓고 싶다. 관의 크기: 6’x6’x7’ 추정)
92회 생신파티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나를 가리켜 일본인, 필리핀인, 몽골인, 심지어 에스키모인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술회하셨다.
장례식의 조문객들은 모두가 아름다운 덕담으로 여사님을 환송했다. 그러나 나는 여사님께서 내게 주신 3가지의 과제를 앞에 두고, 깊은 회한을 느끼고 있다. 늦었고 미흡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을 드리고 싶다. 2003년 도산 선생 탄신 125주기를 계기로 제90차 흥사단 미주대회를 LA에서 치렀다. 보기에 흡족하셨던지 그 후에 내게 하신 말씀이다.
첫째는 ‘흥사단을 일으켜 달라.’는 것이었다. 흥사단은 도산 선생의 분신이다. 오랫동안 흥사단 소식이 끊기고, 소문조차 들리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북미주 지역에 10개의 지부와 보스턴과 중가주까지 합쳐 12개 지역에서 흥사단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은 글로벌시대에 맞게 UN NGO에 가입해 새로운 진로를 찾고, 캄보디아에 도서관도 건립하고 있다.
둘째 소원은 ‘아버지의 생신을 성대히 차려 달라.’ 이러한 행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응집되고, 성숙한 민족으로 발돋움하길 바라셨다. 2007년 9월 초, 도산의 이름 아래 활동하는 모든 분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뜻을 같이 하고, 날짜와 장소, 후원자 명단까지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준비하는 과정에 노동절 연휴가 끼었고, 팩스 전송이 백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행사 진행이 차질을 빚었다. 작은 실수로 그 행사를 성사시켜 드리지 못한 점을 사죄를 드린다. 그 후 필립 커디가 여사님을 모시고 1.5세 2세들을 중심으로 훌륭하게 사업을 펼쳐주었다. 1주일 전에는 그들을 위한 펀드레이징에도 참가하셨다.
끝으로, 참으로 어려운 말씀을 용기 있게 해 주셨다. ‘수산 할머니. 돈이 없어. 자서전 ‘버드나무 그늘아래에서…’를 좀 사게 해줘.’ 각 지부를 통해 얼마큼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리 도움이 돼 드리지 못했다. 여사님도 여느 독립운동가들 가정과 같이 어려웠다. 미 정부에서 받는 남편과 여사님의 연금으로 생활해 오셨다. 한국 정부는 노무현 정권 이전까지 해외 독립유공자에 대한 연금제도가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도산 선생을 해외 독립유공자 중 최고로 예우한다고 들었다.
여사님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셨다. 그러나 국운이 상승하고 대단한 한국인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러나 안수산 여사님이 살아온 질곡의 역사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의 국민성을 은근과 끈기로 표현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냄비근성으로 표현한다. 요즘 한국사회는 억지가 너무 심하다. 생각 없이 너무 쉽게 들끓는다. 이성을 잃은 것 같다.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일본인들은 국가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선 개인의 주장을 유보하고, 국가와 한몸이 되어 일사불란하다. 바로 지금 아베정권 아래 반한감정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항상 웃고 손뼉을 치며 우리를 응원해 주시던 여사님의 모습이 선하다.
안수산 여사님! 염려 마시고 평안히 쉬세요. 원래 우리는 오뚝이 같은 민족, 넘어지면 일어나고, 짓밟히면 솟구쳐 오르는 당찬 민족이지 않습니까. 여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민족의 정신을 세우는 일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 석회관의 크기: 가로 6피트 x 세로 6피트 x 높이 7-8피트 추정 * 시신이 놓인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그려두고 싶다.)
- 위의 글은 2015년 7월 4일자 미주 한국일보 오피니언란에 기고하였다.
- 글 : 흥사단 미주위원부 총무 이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