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월, 7박 8일간의 일정으로 타이완을 다녀왔다.
우리는 주로 해안가로 대만 섬 전역을 돌았다. 타이베이를 기점으로 최북단 부귀각에서 시작하여 예류, 지룽, 이란, 화롄, 타이동, 컨띵 어롼비에서 최남단을 찍고, 헝춘, 가오슝, 타이난, 타이중, 베이터우를 거쳐 다시 타이베이로 섬 한 바퀴를 돈 셈이다. 서태평양에 속하는 대만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3,000m가 넘는 산이 200개가 넘는다는 중앙 고산지대의 신비로움을 뒤로 하더라도 동서남북으로 펼쳐지는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먼 바다 수평선과 쉼 없이 파도를 몰고 오는 에메랄드 빛깔의 해안선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대만인들은 끊임없이 복을 기원한다. 태풍과 지진, 외침과 식민통치, 차별과 백색공포정치 등 대만 역사를 이해하고 보니 복을 기원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시내 거주 밀집지역이나 시장거리에서 사찰이나 사당을 마주한다. 인간 친화적이다. 불도교를 혼합해서 93%라더니 사찰 지붕 문양이 매우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 대부분 관음과 관우를 대전에 모시고 있고 입구에서 ‘천상성모’라고 되어 있는 청동항아리에 분향을 한다. 대만을 지키는 해신도 마조라고 하는 여신이다. 또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사당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공동묘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신과 자연과 죽은 자가 친화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섬이 가슴시린 이유는 이 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가 시련의 역사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1624년 서양제국 네덜란드가 이 섬을 침략했고, 1662년 명나라의 부활을 꿈꾸던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섬을 점령했고, 1683년부터 청의 지배가 이어지면서 대륙의 한족들이 섬에 들어 와 본성인으로 행세하면서 원주민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 성과로 대만 땅을 따먹은 일제 지배가 지속되면서 차별과 수탈이 본격화 되고 원주민은 점점 더 산악지대로 밀려나 고사(枯死)가 일어났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50년 만에 일제가 물러났고, 겨우 외세로부터 해방되는가 싶더니 장개석 국민당 군부가 들어와 대만을 폭력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외성인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에서 인구의 85%를 차지하던 본성인과 외성인 다툼이 증폭되어 1947년 2.28 사건이 일어났고 군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양민을 학살했다. 1949년 공산당 권력에 패한 장개석은 200만을 끌고 대만으로 들어 와 계엄령 하에서 원주민과 본성인을 통치했다. 1975년 장개석 총통이 사망한 후 아들 장경국이 대를 이었고 1988년 리등휘 총통이 취임하면서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대만 민중은 40년간 계엄령 하에서 백색공포정치의 희생양으로 살았던 것이다. 다행히 1988년 이등휘 총통 시기부터 민주화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외성인은 14%정도이며 원주민은 2%정도이다. 국민당은 원주민을 원주족으로 분류하고, 초기 아홉 종족으로 분류하던 것을 각 부족 단위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인증하고 분류하여 현재 행정원에서는 16개 부족이 등록되어 있다.
대만 탐방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서안사변의 주인공 장학량의 스토리와 그가 연금되었던 장소, 베이터우(北投) 방문이다. 이곳은 일제가 개발한 온천 지대이다. 높은 언덕에 장학량이 연금되어 57년 세월을 살았던 샤오솨이선원(少師禪園)이 있다. 장학량(쉐량 또는 샤오솨이로 읽음 1898~2001)은 중국동북군벌 장작림의 장남이다. 일제는 1928년 심양에서 장작림을 제거하기 위해 철도 폭파사건을 일으킨다. 물론 열차에 타고 있던 장작림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게 되고 아들인 장학량이 대를 이었으나 장학량은 방황과 일탈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스승을 만났고, 송미령을 알게 된다. 송미령은 장개석의 부인이었다. 송미령은 첫 눈에 장학량에 반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연모하게 된다. 장학량은 중국국민당의 최고 장교가 된다. 그러나 장개석은 항일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공산당을 때려잡는 일에 총력을 두게 되자 장학량은 이에 반기를 들었다. 아버지의 원수 일본을 몰아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를 위해 국공합작이 요구된 상황이다. 마침내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은 서안의 명소 이화장에서 장개석을 감금하고 총을 겨누고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전을 선언’하게 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개석은 굴복하고 국공합작에 조인했다. 장개석 부대에 밀려 연안으로 쫓기던 중국공산당은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는다. 장개석이 총통부로 돌아가려 할 때 주은래는 장학량이 공산당에 남기를 권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이를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여 장개석 뒤를 따랐다. 장학량은 국민당으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사형을 받을 것인데 송미령이 살려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학량은 국민당정부가 1949년 대만으로 쫓겨 갈 때 같이 끌려와 1977년까지 바로 이 곳, 베이터우 높은 언덕에 가택 연금되어 살았다. 1975년 장개석이 타계하자 국민당은 2년 후 연금을 풀어줬다. 그리고 1993년 57년 만에 비로소 거주이전의 자유가 허락되자 장학량은 노구를 이끌고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건너갔다. 장학량은 2001년 10월, 103세로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끝으로 대만역사탐방을 통해 일제 강점기 신채호선생과 조명하의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 신채호는 1928년 5월 8일 이 곳 지롱 항 지롱우체국에서 체포되어 대련으로 압송될 때까지 지롱수상경찰서에서 한 달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대련으로 이송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1936년 2월 21일 56세일기로 순국하였다. 위조지폐 사건이라니, 어쩌면 일본경찰은 단재선생을 심문하면서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무참히 훼손하였을 것이다. 단재선생은 아나키스트 선전 기관과 일제 관공서 폭파를 위한 폭탄제작소를 만들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대만 지롱 항으로 선생의 체포 장소를 찾아 온 우리는 선생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가슴 아프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선생의 호통이 귓전을 맴돈다. 또 한분, 타이중에서 조명하의사가 일황의 장인인 황실 세력가 구니노미야를 독이 묻은 단검으로 처단한 현장을 방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1928년 5월 14일 거사를 치른 당시 조명하의사는 24세였다. 지금은 사라진 타이중도서관 거리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거사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정으로 치닫는 영화의 명장면을 떠올렸다. 의거의 결심과 치밀한 준비 과정이 감동이다. 독립운동을 하려고 일본에서 상해로 가려다가 낯선 타국 땅 대만 타이중에서 당당히 거사를 치른 조명하의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홀로 아리랑’이란 쓸쓸하고 의로운 이미지가 선생의 얼굴과 함께 아른거린다. 거사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2014년에 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정에 조명하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신채호 선생은 1928년 5월 8일에 체포되었고, 조명하의사는 1928년 5월 14일에 구니노미야를 처단했다. 나는 1928년 5월을 꼭 기억해 두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1932년 4월 2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과 중국과 대만의 영수들과 함께 항일통일전선 구축을 선언하고 1차 원동대회를 개최한 사실에도 주목한다. 그 날로부터 6일 후인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있었고 도산은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너무나 아쉽고 허무한 일이었다. “역사교육은 기억에 대한 훈련과 영혼에 대한 세례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인생으로 하여금 강력한 신념과 행위를 갖도록 한다. 한 민족이 만약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다면 영원히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여순감옥 국제지사관 출구에 새겨진 글귀를 교훈으로 다시 새겨본다.
- 글 : 흥사단 교육수련원 원장 이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