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도복 차림의 한규인 단우(75)를 최근 시립화곡청소년수련관에서 만났다. 한규인 단우는 서울지부 초대 사무국장, 공의원, 강서청소년회관 관장 등을 역임하고 2월 강서분회를 창립해 분회장을 맡고 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화곡청소년수련관과 강서청소년회관에서 재능기부 형식으로 성인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러기』 1976년 8월호 이달의 사진에 수록된 수련 모습
본인을 흥사단의 덕·체·지 3육 중 체를 담당했다고 밝힌 한규인 단우는 명동의 대성빌딩과 대학로 흥사단 회관에서 태권도를 지도한 일을 전했다. 명동의 대성빌딩 시절, 금요강좌가 없는 평일에는 강당에 매트를 깔고 태권도장으로 활용했고, 지금의 단소로 이주할 때는 건물 지하를 아예 체육관으로 설계하여 도산체육관을 개설해 운영했다. 하지만 4년 정도 운영했을 무렵 회관 일대가 번화가가 되면서 체육관 운영이 임대 수입만 못해 체육관 문을 닫고 그 공간을 임대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흥사단 국토탐험대(1999년 동계 경상남도 탐방활동)
그는 흥사단 국토탐험대를 기획하면서 청소년에게 흥사단 정신을 알리고 자립심을 키우는데 주력했다고 했다. 15박 16일 매일 걸으면서 ‘단우회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말미의 우리 흥사단을 ‘국토탐험대’라고 바꾸어 부르며 행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청소년 단우가 되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30끼를 손수 지어먹으니 밥 짓는데 달인이 되고 편식이나 반찬투정은 옛 얘기가 되었다고 했다.
국토탐험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고도 있었는데 사고가 나면 다음해에 사고를 나지 않게 방안을 짜는 것이 아니라 탐험대 행사 자체를 없애 버렸다며 이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는 격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다.
흥사단 입단계기를 묻는 질문에 고교를 마칠 즈음 흥사단을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힘주어 말한 한규인 단우는 만약 흥사단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 했다. 방황과 울분의 청소년기에 흥사단 정신에 매료되어 지금의 건강한 삶을 사는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강서분회를 창립한 것도 흥사단에서 받은 은혜를 다소라도 탕감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회 창립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강서 분회원 대부분이 강서청소년회관과 화곡청소년수련관 청소년지도자인 점을 감안해 흥사단 정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끝으로 현 지도부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견에 대해 흥사단이 운영하는 청소년 시설은 흥사단 냄새가 나고, 여타의 다른 시설과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설에서는 흥사단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고, 본부는 수탁시설에서 흥사단 대민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순환보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제시했다.
인터뷰 마지막에 한규인 단우는 아카데미 부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청소년의 정신적인 안식처로 흥사단이 영구히 존재하는 길은 1960년대 아카데미 운동을 새로운 시대에 적합 운동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