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정지웅(아신대, 코리아통합연구원)
올해는 광복 78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남과 북은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어서 아직 통일은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고 있다. 혹자는 아직 분단을 해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완전한 광복을 찾지 못했다도 말하기도 하는데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광복은 말 그대로 우리가 빛을 되찾는 날이라는 의미이므로, 통일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민족끼리의 안보 불안에서 벗어나서 밝고 안전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진영의 역사적 맥락
1919년 3·1운동이 좌절된 후, 독립운동 진영 사이에 운동의 방법과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독립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으로 갈라졌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독립한 다음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나 물산 장려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청원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후 제국주의 열강들한테서는 기대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많은 이들이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이렇게 사회주의 계열은 1918년 연해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본격적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시작으로 무장독립운동과 조직운동 등을 벌이며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를 이뤘다.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노동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계급 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나키스트(anarchist)는 모든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며 아나키즘 독립운동 즉 무정부주의운동은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일제(日帝)에 반대하는 반제 · 반자본 운동과 함께 반 볼셰비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순종 황제 인산일의 6.10 만세 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대를 추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신간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이처럼 흐름을 달리한 각각의 그룹에 속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립과 주도권 다툼을 하기도 하며 서로 협력하기도 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독립유공자 서훈의 역사적 한계와 전향적 발전
한편 독립유공자 서훈은 1949년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내국인에 대한 서훈은 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를 비롯해 외국인 16명에게만 서훈하였는데 이는 친일 세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의 한계이며 민족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해방된 지 무려 17년이나 지난 1962년부터이다. 그러나 1962년 서훈은 독립유공자의 선정과 훈격 등에서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나 평가보다는 군사정부의 국민적 지지와 민심을 확보하기 위해 체계적인 준비 없이 시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독립유공자의 훈격은 1962년 이후 서훈에서도 생존 지사와 유족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1968·1977·1980년에 선별적인 훈격 조정이 있었으며, 1990년 상훈법 개정에 따라 1990·1991·1992년에 대규모 훈격 조정이 이루어졌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정치적 과오를 범한 자’로 분류되어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의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지만 당시는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기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포상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선별적으로 서훈하기 시작하여 독립유공자 서훈에서도 이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는 서훈 인원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서훈의 정례화, 국가보훈처의 발굴포상,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서훈 확대 등의 영향이 컸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광복 이전 사망한 경우 선별적으로 서훈되었고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벌인 경우, 서훈에서 제외되어왔다. 그러나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더라도 대한민국 체제를 적극 부인하지 않은 경우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시작했다. 특히 가족 중 북한 정권에 협력했던 독립운동가는 서훈에서 제외했던 연좌제가 1990년에 폐지되면서 그 해에만 100여 명의 유공자가 서훈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독립유공자의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념의 한계를 벗어나 전향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동휘(李東輝, 1995, 대통령장)·여운형(呂運亨, 2005, 대통령장)·권오설(權五卨, 2005, 독립장)·김철수(金綴 洙, 2005, 독립장) 등 다수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서훈되었다.
독립운동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국가보훈부가 부 승격 이후 독립유공자 서훈 재검토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역대 정부에서도 독립유공자 서훈 작업은 있었지만, 이번 정부에서는 서훈 공적심사위 운영규정을 개정해 이미 받은 이들에 대한 서훈 박탈 여부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보훈부에서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대상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임을 보여 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의 입김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독립운동가 서훈의 요체는 ‘배제’가 아니라 ‘존중’이 돼야 한다. 물론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나중에 친일로 변절했다면, 당연히 서훈 대상자가 아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현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그의 사상과 관계없이 일단 포용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서훈해야 할 것이다. 침탈한 일본에 분연히 저항한 그들의 정신을 기려야 한다. 철 지난 반공주의 등으로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단하는 무례를 멈춰야 할 것이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아직 한반도를 휘감고 있기 때문에 분단과 전쟁의 기억이 고통스러운 이들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독립운동가 서훈에 있어서조차 인색함을 드러내는 한계는 이제 극복해 내어야 한다. 하루빨리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이 땅에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고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활동을 함께 기리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