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론과 기계론에 빠진 현대 기술문명은 생명의 존엄과 영혼의 고귀함을 잃어버렸다.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죽은 물질과 영혼 없는 기계로 다루는 현대문명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오늘 대의민주주의는 헌법이 추구하는 국민의 주권, 존엄, 행복을 실현하지 못한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선동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산업혁명은 많은 인간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뿐 아니라 인간의 일자리를 뺏고 생산활동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고 있다.
오늘 문명과 민주정치와 산업사회의 위기는 약육강식과 부국강병을 추구한 국가주의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론과 기계론에 함몰된 국가주의문명은 국민을 노동력과 군사력으로 동원하고 사용할 뿐 나라의 주인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국가주의문명이 강성할 때 생겨난 학교의 연구교육체계는 국민을 국가의 인적 자원으로 양성할 뿐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만드는 인간교육과 덕성교육은 할 수 없었다.
도산은 평생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서 낡은 왕조사회와 국가주의문명을 혁파하고 새 인간, 새 민족, 새 나라, 새 문명을 추구했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의 이념을 제시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그의 신민운동은 이름 그대로 민을 새롭게 하여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운동이었다.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공립협회의 강령과 목적은 민이 ‘서로 단합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민이 서로 단합하고 보호함’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함으로써 도산은 국가주의문명을 뿌리채 뒤집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문명관과 국가관을 확립하였다.
그의 민족교육운동과 흥사단운동은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민의 인격과 덕성을 단련하고 높이는 운동이었다.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어디나 자치와 협동의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미국에서 일할 때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체포되어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그는 언제나 이상촌(모범촌, 마을공화국)을 세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흥사단 입단문답에서도 전국 마을 곳곳에 모범촌을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서 모범촌을 세우는 일에 온 힘과 재산을 다 바쳐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마을공화국을 세우는 것은 도산이 남긴 유훈이라고 생각한다.
도산의 철학은 민주공화의 철학이면서 그대로 마을공화국의 철학이다. 마을공화국을 이루려면 민의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인격을 확립할 뿐 아니라 마을공화국의 주인을 위한 행동원칙, 생활원리, 생활정신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원칙과 생활원리와 생활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인격과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과 수양의 체계와 방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도산은 스스로 인격과 덕성을 수양하고 단련하는 모범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수양과 단련의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마을공화국을 세우려면 민족정신의 장점을 계승하고 살리면서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산은 자아와 민족의 혁신을 추구하였다. 한국 민족은 정이 깊고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1인칭이 생략되거나 약화되고 3인칭이 없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나’가 확립되지 못하고 제3자의 객관적 관점이 약화되기 쉽다. 자치와 협동의 생활공동체를 확립하려면 먼저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자아 ‘나’를 확립하고 제3의 자리에서 보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정신과 사상을 확립해야 한다.
도산은 나라의 주권자인 민(民)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중심에 두고 나라의 주인인 ‘내’가 나라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게 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나’에게서 시작하였다. 도산은 나의 건전한 인격을 확립하여 나를 바탕으로 조직과 단체의 단결에 이르고 조직과 단체의 단결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고 세계의 번영과 평화에 이르려고 하였다. 도산은 무한히 개방적이면서 무한한 책임을 지는 ‘나’의 철학을 확립했다. 마을주민의 주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나’철학은 자치와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마을공화국의 기본철학을 이룬다.
도산이 강조한 무실역행(務實力行)은 마을공화국 주민의 행동원칙이다. 마을구성원들이 거짓을 일삼고 저마다 제 할 일을 힘써 하지 않는다면 마을공화국은 성립될 수 없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남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애기애타(愛己愛他)는 마을공화국의 생활원리다. 나와 남을 서로 주체로서 존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마을공화국은 지탱될 수 없다. 도산이 강조한 대공정신(大公精神)은 마을공화국의 생활정신이다.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초월하고 진영과 당파, 이념과 주장을 넘어서는 대공정신이 없으면 마을공화국은 중심과 목적을 잃고 만다.
도산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생명과 인간을 파괴하고 죽이는 국가주의문명에 맞서 새로운 문명관과 국가관을 확립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인간교육과 덕성교육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공화국의 철학을 정립하고 실천한 위대한 철학자였다. 씨올공부방을 통해서 마을공화국의 철학으로서 도산의 애기애타 사상을 널리 알리고 있는 신용인 교수는 도산에 대한 경외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크고 깊은 영성과 헌신적인 사회참여, 숭고한 이상과 실용적인 지혜, 남을 먼저 생각하고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 작은 것 하나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정성 … 어떻게 한 인간의 인격이 이토록 완벽할 수 있는지 경이롭다.” 도산은 문명, 민주정치, 경제사회, 교육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과 방안을 마련하였다. 도산의 철학과 정신을 가지고 마을공화국을 세움으로써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 인간, 새 나라, 새 문명을 이루어가면 좋겠다.
* 글 :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