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자료] 원동에서 통일독립운동을 주도한 흥사단 단우들
- 임시정부 요직 21%를 점유하다 -
들어가며
흥사단은 1945년 해방 이전에 입단한 단우 560인(통상 443, 예비 84, 특별 33) 중 174인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직한 사람은 39인에 이른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단우는 33인이며, 임시국무원에서 각료·국무원·국무위원을 역임한 단우는 9인, 차장 이하는 23인으로서 전체적으로는 47인의 단우가 양대 기관에서 재임하였다.
상해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을 약 1년 앞두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흥사단의 1세대 단우들이 임시정부에서 차지하였던 위상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흥사단의 역사적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향후 흥사단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지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의 임시정부 재직자 명단을 『흥사단100년사』(흥사단, 2013)과 『흥사단인물101인』(흥사단, 2015)의 단우 명단과 경력을 교차 확인하는 방법으로 명단을 작성하고, 임시정부와 그 산하조직 혹은 정당 등에서 활약한 단우의 면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임시의정원 의원 20.8%를 점유하다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가 1920년 1월 창립을 준비할 때부터 1945년 8월 17일 임시의정원 제40차 회의를 소집하기까지 흥사단 단우들은 의원 연인원 기준으로 전체 542인의 20.8%인 113인에 달할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의장을 지낸 단우는 손정도(1921), 조상섭(1924), 이강(1927), 송병조(1926, 1934~37, 1941), 김붕준(1939, 1941) 등이었으며, 부의장은 조상섭(1924), 최석순(1926), 이강(1926), 차리석(1929, 1932~1939) 등이었다. 김붕준이 1941년 의장으로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의정원에 끌어들이다가 탄핵을 당하자 송병조가 의장에 선출되어 이를 관철시켰다. 명단이 재대로 확인된 22차례의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홍서, 이광수, 김구, 차리석, 김마리아, 김붕준, 임득산, 최석순, 이유필, 문일민, 나창헌, 송병조, 홍재형, 선우혁, 이탁, 안창호, 신공제, 양준명, 박창세, 장덕로, 양명진, 이준식, 유진동, 안원생, 신영삼 등 25인이 의정활동을 하였다.
국무원의 요직 20.9%에서 헌신하다
임시정부의 수반으로는 도산이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1919. 6.28~9.11), 법무총장(겸임 1919.7.7~9.11)을 지냈으며, 특별단우인 김구도 국무령(1926.12.10 ~1927.4.11)을 역임하였다. 정부 수반이 주석제로 전환된 후 송병조(1933.6~ 1933. 12.30), 김구(1940.10.9~)가 임시정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국무원에서 총장급 이상의 핵심 요직을 지낸 단우는 전체의 20.9%에 달했다. 대통령제 1~5기(1919.9.11~1925.7)에 안창호(노동국 총판), 정인과(외무, 대리차장), 손정도(교통), 조상섭(학무, 학무겸 교통), 이유필(내무, 내무겸 노동국총판), 안창호(노동국총판), 김구(국무총리 임시대리겸 내무, 내무겸 노동국총판) 등에 국무령제 1~3기(1925.7~1927.4)에는 조상섭(법무), 이유필(재무) 등이 국무령 혹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국무위원제 1~7기(1927.8~1940.10)에는 송병조(주석·재무1933, 재무, 무임소), 김구(내무, 군무, 재무), 차리석(내무, 비서), 이유필(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인 주석제 1~2기(1940.10~?)에도 흥사단 단우들은 김구(주석)를 차리석(비서장), 김붕준(국무위원), 최석순(문화)이 보좌하며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임정 산하조직의 핵심이 되다
상해임시정부 산하기관에서 활약한 단우는 임시사료편찬위원회(1919.7발족)의 안창호(총재), 이광수(주임) 외 4인의 위원, 독립신문(1919. 8.21 창간)의 이광수(사장 겸 편집국장)와 3인의 기자 등이다. 또한 대한적십자사(1919.8 창립)에서 회장 안창호(초대)·손정도(1922)과 부회장 안정근, 상의원 임득산·정인과·김홍서·유기준·선우훈 등이, 인성학교(1917~1975)에서는 교장 안창호, 손정도, 김붕준과 교사 4인이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6일 발족한 상해교민단(상해거류민단)에서 이강, 김홍서, 이유필 등이 단장을 선우혁, 나창헌, 안정근 등이 임원으로 재임하였다.
1922년에 상하이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현안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운영되었던 시사책진회에 안창호·차리석·유기준·안정근·손정도·이탁·조상섭·이유필·김구·천세헌·김홍서·이강·김붕준 등이 참여하였다. 한편 도산이 막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22년 10월 28일 창립된 한국노병회에서는 이사장 김구 외에 발기인 16명 중 조상섭·이유필·손정도·김홍서·김두만·나창헌 등 6명이, 일반 회원으로 최석순·문일민·이강 등이 활동하였다. 1925년 6월 13일 창립된 임시정부 경무국 후원단체 정위단에 안창호(발기위원)·박창세·박규명이 참여했으며 이 단체를 기반으로 나창헌(대장)·이유필·박창세·박규명이 1926년 1월 1일 병인의용대를 결성하여 의열투쟁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에서 활약한 단우는 1920년대의 이탁(대한광복군총영), 이준식(정의부-한국광복군), 김재덕(정의부) 등이었으며, 박창세·이준식·문일민 등은 1931년 9월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신공제(한국광복전선), 고영선(김광)·유진동·양명진·정훈·이자해·김덕목·김효숙·김정숙(한국광복군총사령부), 류기석(유격대) 등이 활약하였다.
대독립당 결성을 주도하다
도산은 1926년 5월부터 조상섭·차리석 등과 함께 유일당운동을 이끌다가 구익균·신영삼·김기승과 더불어 대독립당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1930년 1월 25일 창단된 한국독립당의 창당 멤버 28인 가운데 안창호·김홍서·안공근·선우혁·송병조·조상섭·이유필·차리석·김붕준·장덕로·이탁·김구·박창세·최석순 등 14인이 흥사단 단우였다. 김붕준은 1932년에 광동지부장이 되었으며 이후 충칭에서 재창립된 국독립당에 양명진·최선화·이준식(1940) 등이 입당하였다.
도산은 1930년부터 대공주의(大公主義)를 강령으로 비밀리에 결성을 본격 추진한 대독립당에 차리석, 송병조, 이유필, 구익균 등이 핵심 멤버로 참여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도산이 피체된 후 장덕로·송병조·차리석·선우혁·조상섭 등이 1934년 조선독립당을 결성하였고, 1935년에 5당 통합으로 탄생한 민족혁명당에서 신공제·유진동·유기석 등이 활약했다. 1945년 2월 7일 결성된 신한민주당에서 김붕준(주석)·신공제·문일민·유진동·안원생·신영삼 등이 활동하였다.
별첨1-임시정부 부서별 직원 단우명단 (180430)
별첨2-임시정부 임시국무원위원 단우명단(180517)
별첨3-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단우 현황(180517)
* 글 : 박화만(흥사단시민사회연구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