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항쟁은 우리 모두가 함께 치유해야 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지난 3월 14일~15일 양일간 제105차 단대회기획위원회를 제주지부에서 진행했다. 단대회 전반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고, 단대회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답사지를 탐방했다. 답사지는 주로 4.3항쟁과 관련된 곳들이었다. 4.3항쟁 유적지는 전체면적의 10%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관광도시 제주의 또 다른 얼굴이다.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승자들의 역사왜곡이며, 진실은 수십 년 동안 은폐되어왔다.
호로위츠(Irving Louis Horowitz)는 국가이념에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학살을 제노사이드라고 정의했다. 4.3항쟁은 우발적 사건으로 촉발되었지만 미군정과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제노사이드로 정의될 수 있는 민족사적 비극이다. 식민시대가 분단시대로 전환되던 미군정 통치시기, 말하자면 정상적이지 않은 이행기적 국가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이 함께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이며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우리가 제주도를 관광도시만으로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알뜨르 비행장’ - 일본의 태평양전쟁 최전선 방어전략지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제주도를 일본본토 사수를 위한 교두보로 인식했으며, 대미(對美)방어를 위해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했다. 일본의「결7호 작전」은 미군의 제주도 알뜨르 비행장 사용을 막기 위한 최후의 결의를 다진 본토 방어작전 중의 하나였다. 알뜨르 비행장은 4.3항쟁을 식민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있는 유적지이다.
‘동광리 큰넓궤’ - 4.3항쟁 당시 주민의 은신처
1946년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에 주민모두가 항거하며, ‘보리공출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큰넓궤’로 피신했다. ‘큰넓궤’는 약 180m 정도의 천연동굴로, 120여명의 주민이 50∼60일 동안 숨어 있었던 은신처이다. ‘큰넓궤’의 좁은 입구를 지나 10m 지점에 이르면 높이가 50cm로 급격하게 낮아지는데, 그 구간은 약 30m 정도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 안쪽 깊숙한 곳은 앞선 구간과 비교할 때, 광장이라 할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몇 곳은 층을 이루기도 했다. 각각의 공간은 숙식과 회의, 취사 등의 용도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큰넓궤’ 의 전체구조는 주민들이 왜 그곳을 은신처로 선택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듯했다. 입구의 좁은 구간은 토벌대가 주민들을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위장하기 좋은 구조였다. 만약 발각되더라도 상대적으로 방어가 유리했다.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 불규칙적인 바위와 돌들로 위험하긴 했지만, 불빛이 있다면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할 만큼 여유로운 공간이다. ‘큰넓궤’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었을 때, 주민들은 입구 쪽에다 이불을 모으고, 고춧가루를 뿌린 후 불을 붙여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 토벌대를 방어했다고 한다. ‘큰넓궤’가 발각된 이후 주민들은 15㎞쯤 떨어진 한라산의 볼래오름 등지로 은신처를 옮겼으나, 이내 발각되어 모조리 총살당했다고 한다.
만약 4.3항쟁이라는 비극이 없었다면, ‘큰넓궤’는 소꿉 시절의 숨바꼭질 놀이하던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4.3은 ‘큰넓궤’를 사선(死線)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 전체를 집단 학살이 자행된 한이 서린 곳으로 만들었다. 제주를 관광지로만 인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국가로부터 가해진 폭력을 방관한다면, 그 다음 피해자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역사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 후손들은 불의가 지배하는 참혹한 역사를 살아야한다. 그러한 역사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
‘월령리 무명천할머니 삶 터’ -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상징
1949년 1월 12일 35살이었던 진아영씨는 경찰의 총탄에 의해 턱을 잃었다. 동시에 그녀의 삶도 무너졌다. 무명천으로 턱을 가리고 살아야 했던 그녀는 잠깐 집을 비울 때조차 자물쇠로 문을 꽁꽁 잠그고 그 누구한테도 음식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4·3 후유 장애와 심장질환 등으로 55년 동안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녀에게 일상은 견뎌내기 힘든 고통 그 자체였으며, 삶은 살아내야 하는 업보였다. 4·3의 상흔은 그녀의 삶을 타인으로부터 격리시켰으며, 모든 고통은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천형(天刑)이었다.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그녀는 4.3이라는 국가폭력을 5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온몸으로 감당해 온 식민과 분단역사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녀의 고통은 모든 제주도민의 고통이자 한민족 전체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이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또는 百祖一孫之地)'
1950년 전국의 30여만 명이 학살되는 이른바 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 역시 그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정치범을 탄압하기 위한 구금령이었던 예비검속법이 부활한 것이다. 예비검속 희생자 대부분은 제주4·3사건이나 좌익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344명이 사상 불순분자로 법적절차 없이 총살당했다. 4·3항쟁 처리 지원단에 따르면, 시신을 거두지 못한 희생자만 4,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또는 百祖一孫之地)'는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뜻으로, 후손들이 봉분을 세워 가묘로 조성한 공동묘지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4.3유적지 답사 내내 비가 내렸다. 한경찬 제주지부 부지부장은 비명에 간 4·3원혼들의 눈물이라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카아(E. H Carr)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적 의미에 ‘사회’라는 공간적 의미를 결합하여 역사 탐구의 초점이 개인보다 사회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남긴 명언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역사적 사건은 맥락적으로 평가해야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카아는 역사가 개인의 의도를 초월한 힘에 의해 작동되며, 개인은 특정시대를 대변하는 산물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역사적 사건은 복합적 인과연쇄로 구성된다. 따라서 역사에서 우연과 필연은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구조적 맥락에서 진행된다. 제주4·3항쟁 역시 그랬다. 따라서 4·3항쟁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맥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동시에 이념이 아닌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4·3항쟁은 식민과 분단의 비극적 역사의 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제105차 흥사단대회가 4·3항쟁을 재조명하고 역사정의를 고민하고 나누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제105차 흥사단대회 : 2018년 11월 3∼4일, 제주청소년수련원에서 제주지부 주관으로 개최.
* 글 : 정현숙(흥사단본부 조직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