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이명화(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래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 관내와 일본, 그리고 하와이와 북미, 멕시코, 쿠바 등 전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매년 한민족 최대의 경축일로 3·1절을 기념해왔다. 독립운동시기 3·1정신은 한민족이 지켜야 할 절대 가치를 보여주는 표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올해 3·1절 104주년의 날에 어떤 이가 일장기를 게양하여 이웃들의 항의와 비난을 사고, 구설수에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생각해 일장기를 내걸었다고 변명하였지만, 그 내용을 보면 3·1운동과 그 정신에 대해 무지할 뿐이니라 천박한 역사 인식에 놀랄 뿐이다.
1919년 3월 1일은 나라를 잃은 한민족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한 날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세계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시점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세계 약소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준 획기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지 9년간의 무단적 공포통치로 길들어진 한민족에게 더 이상의 민족적 저항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였다. 반면 민족자결주의의 소식을 전해들은 국내외의 한인들은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었다.
국외 한인사회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일본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의 주도로 3·1운동이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여러 종교의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을 준비하며 운동의 3대 원칙으로 ‘일원화’, ‘비폭력화’, ‘대중화’를 제시하였다.
일제는 3·1 독립선언이 발표되기까지 민족 내부의 그 어떤 움직임도 감지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3·1운동은 일원화되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수많은 민중의 가슴 속에 품어온 독립의 의지가 독립선언과 함께 일제히 분출하였고 청년, 학생들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방의 남녀노소 모두의 가슴에 자유에 대한 열망과 독립 의지의 뜨거운 불이 지펴졌으며 그 불꽃은 일제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총칼의 위협에도 꺼질 줄 몰랐다. 시위를 지켜본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은 무장을 하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를 일으켰으며 그 어느 나라의 애국자보다도 명예롭고 숭고하게 한국의 애국 열사들이 독립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몽둥이와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총검에 찔려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죽음을 맞아야 했다”고 전언하였다. 2개월 사이에 전국으로 번져간 독립만세의 함성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종교를 초월해 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안겨 주었다.
한반도 전체를 헌병경찰제로 통치하는 폭력체제에서 ‘비폭력화’원칙은 3·1운동을 평화적으로 이끌고자 했으나 일제는 평화로운 시위를 유혈 진압하였고 주도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였다. 그리고 시위 참가자들에게 태형을 가해 문명국 일본이 아니라 야만국 일본의 정체를 들어내었고 만세시위는 과격 시위로 번져갔다. 일제의 폭력적 탄압으로 한국민은 큰 희생을 치렀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민에게 은혜로운 것이라는 선전은 거짓임이 폭로되었으며 죽음을 무릅쓴 한국민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의 대중화 원칙은 3·1운동의 주체가 대중, 즉 민중이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어린이를 포함, 남녀 학생들과 기생·과부와 같은 사회 저층의 여성들, 노동자·농민들이 사회 상층부나 지도자들의 지도 없이 자발적으로 3·1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폭압적인 정치 지배와 수탈을 일삼는 일제에게 한민족의 정의와 인도(人道), 생존과 존엄의 길에 동반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한민족의 요구를 듣지 않고 일제가 불의를 계속 저질을 경우에는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할 것이며 그 어떤 시련과 수난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한국의 3·1운동은 제국주의 지배를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인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민족들도 차별과 불의에 저항하고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큰 희생을 치루면서 독립을 선언했지만 끝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은 결코 실패한 운동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3·1운동 전과 후로 구분되며 한국 혁명의 단초를 열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이후로도 26년간 계속되었으나 국외 동포사회에서 매년 개최된 3·1절은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독립국가 건설의 비전을 심어주는 광장의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의 정신은 침략과 파괴, 폭력을 일삼는 그 어떤 정치세력의 이기주의와 파시스트, 전체주의에 위협받는다 해도 자유와 평등의 정당한 권리와 독립과 민주주의, 평화의 소중함을 지키려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시기 우리 선열들이 꿈꾸고 염원해왔던 통일된 민족국가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수호하는 민주공화국으로 성장하는 모범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다. 이제 분단체제를 종식하고 세계를 선도해 나가는 경제강국, 문화강국, 자유민주주의 선진국가로 나가는데 우리의 3·1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