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는 두 나라 외무장관들 명의로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논란의 단초가 되고 있음이 점차로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우선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굴욕적인 합의라고 규정하고 그 수용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해 많은 시민단체들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고, 일부 대학생과 고등학생 청소년들은 위안부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우리 정부의 이번 합의는 분명히 그 내용이 미흡하고 과정도 부실하여 국민적 동의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 단추는 일본 정부가 먼저 법적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서는 <일본군의 관여 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식의 표현으로 봉합하고 말았다. 위안부 문제를 발생시킨 책임 주체부터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와 시설을 만들고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그들을 강압적으로 학대해온 분명한 사실을 단지 일본군의 관여 하에 있었던 일이라는 정도로 애매모호하게 미봉한 것이다. 말로는 비록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그 당연한 귀결로 일본정부가 내는 10억 엔은 법적 책임에 따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으로 직접 지불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정부가 설립해 운영하는 기금에 출연하는 방식으로 마치 귀찮게 떼쓰는 사람들을 입막음하기 위한 구호금처럼 되고 말았다.
물론 정부의 해명처럼 상대가 있는 협상에서 한쪽의 주장만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난 세기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명백한 죄과 자체마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 내 극우파 아베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분명히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차라리 미결의 과제로 남겨 두는 것이 옳다. 전쟁 도발이나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시효 자체가 없음으로 당장 해결이 어렵다면 차라리 후일을 기다려 뒤로 미루는 것이 낫다. 정부는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20여 년 넘도록 절절히 요구해온 것은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그에 따른 정당한 배상 아니었던가. 당사자들은 이번 합의로 인해 오히려 인격적으로 두 번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또 정부가 그분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진정으로 걱정했다면 그 정도는 우리 돈으로도 얼마든지 먼저 도울 수 있지 않았겠는가.
정부 역시 당사자들의 이런 반응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합의에 이르기 전에 피해자들을 만나 고충을 설명하고 최대한 성심껏 양해라도 구하는 노력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부실한 미봉책을 최소한의 사전 노력도 없이 뭔가에 쫒기 듯이 그것도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방점까지 얹어 동의해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돌아보면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부터 근 3년 동안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나름의 원칙을 견지해 왔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일본의 거듭되는 정상회담 요구에도 불구하고 먼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성의를 보이라는 입장을 지켜 왔던 것이다. 국내 정치적 효과 외에 외교 전략으로서 이런 과거사 연계 방침이 과연 현명한 것인가 하는 논란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득실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나름대로 하나의 원칙을 지켜온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더니 절대 해를 넘겨서는 안 되는 화급한 문제라도 되는 냥 서둘러 합의한 것이다.
이미 다 알려지고 있듯이 이번 한일 간 졸속 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주축으로 한다. 따라서 미국은 한일 간의 원만한 관계 증진을 원했고 양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그걸 주문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밀접한 경제 관계와 북한문제의 해결에 또 한편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우리 정부로서는 나름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보수세력과 북핵문제 등 제반 상황은 한미일동맹의 강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형세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
따라서 군사동맹까지를 내다보는 한일관계 개선은 피할 수 없는 사안이 되었고 그동안 위안부문제 해결을 그 선행 조건으로 내걸었던 우리 정부 방침은 도리어 자승자박의 굴레가 되어 이번 파행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냉정히 보면 한일 간의 미해결 인도적 과제 중 하나였던 위안부문제가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밀려 엉뚱한 결과로 졸속 처리된 것이다.
우선 이번 합의를 통해 우리 정부의 처지가 무척 곤궁해 지고 말았다. 피해 당사자인 소수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분노와 반발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정부의 개별 설득 노력으로 잦아들 수 있겠지만 당장 일본 정부와 약속한 위안부소녀상 이전이 문제다. 합의문 발표 직후부터 일본은 소녀상 이전이 10엑 엔 출연의 전제조건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합의 당사자인 일본 외상은 소녀상 이전을 포함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노라고 자랑하면서, ‘우리가 잃은 것은 10억 엔 뿐’이라고 속셈을 털어 놓았다. 국민 감정상 참으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 문제는 최소한 눈앞에 닥친 총선까지 만이라도 양해해 달라고 일본정부에 열 번 스무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에서는 우리 정부를 당혹스럽게 하는 언행들이 거침없이 계속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이 다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고 기고만장해 하고, 정부 내 고위 인사라는 자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언까지 자행해 시간이 흐를수록 이번 합의의 문제점만 선명히 부각시켜 주고 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다시 확인되는 점은 우리 정부의 외교력이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세계적 변화 추세와 특히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과연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의 미래 진로를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믿음을 도무지 가질 수 없다. 이번의 경우 원칙 아닌 원칙에 매달리다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피해 당사자들의 가슴에 더 큰 한을 남기고 정부 스스로는 국민과 일본 정부 사이에서 궁지에 몰려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딱할 뿐이다. 최근 북핵문제 해법을 놓고도 단지 대북 압박에 동참하라고 중국을 채근해 대지만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국력으로 보나 지정학적으로 보나 우리에게는 특히 외교가 중요하다. 불쑥 독도를 방문해 일본 내 여론만 악화시킨 이명박 전 대통령 못지않게 현 박근혜 대통령도 외국 방문이 빈번하다. 그러나 진정한 외교는 국제정세 변화를 통찰하는 안목과 확고한 역사의식 그리고 국민적 동의에 기반해야 국익신장이라는 본래의 의의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 글 : 박만규(흥사단교육수련원장/전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