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인물101인』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피상적으로 알았던 많은 인물들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되었다. 흥사단 100년의 역사가 있기까지 수많은 선배 단우들의 헌신이 있었고, 또한 그분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분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서산(西山) 정석해(鄭錫海) 박사의 삶은 필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학창시절 큰 행사가 있을 때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으나 늘 조용한 학자풍의 모습에서 많은 원로 단우 중의 한 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는 단에서조차 「기러기」에 몇 줄의 기사로 부음을 알렸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석해 박사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서산은 1899년 4월 24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문봉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선천의 신성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특별히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실력 있는 교사로 바꾸어 달라고 학교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과 시위를 했고, 3학년을 수료하고 결국 소요사태의 주동자로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 후 상경하여 1917년 3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수학‧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강의 수준에 실망하여 곧 문과로 옮겼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서산은 연희전문학교 2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인정된 학생자치단체인 YMCA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을 것이란 연락을 받고 3월 1일, 일찍 친구와 함께 현장으로 가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하고, 친구 2명과 함께 학교에서 등사기와 종이를 가지고 자신의 하숙방에 가서 독립선언문 4,000매를 인쇄했다. 그 중 몇 매를 자신의 고향 철산의 유지 유봉영에게 우편으로 보내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리고 3월 5일 서울역전과 남대문 일대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삼엄한 경찰의 검거와 감시망을 피하여 은신해 있다가 서산은 고향을 거쳐 3월 18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으로 갔다. 뜻밖에 고향 출신 독립운동가 김진제를 만났는데 그가 길림의 김동평에게 편지를 전해주라는 부탁을 한다. 도착해 보니 육혈포 4정을 받아가지고 오라는 위험천만한 임무였다. 몇 차례 위기를 겪고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그 총을 국내에 전달하라고 한다. 목숨을 건 임무를 무사히 마친 후, 서산은 거액의 자금을 운반하기 위해 한 차례 더 국내에 다녀와서야 겨우 여비를 얻어 상해로 가게 되었다.
서산은 1920년 6월 상해에 가서 고향 친구 임득산의 소개로 도산을 만나 흥사단에 입단했다. 민족운동을 하더라도 늘 자아의 성장을 위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도산의 말씀을 듣고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11월에 상해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기차로 파리에 도착한 것이 12월 14일이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서산은 고된 노동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와 베를린 대학에 갔다가 다시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1930년 10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을 했으나 오갈 데 없는 망국인의 한을 안고 파리에서 연구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파리의 상황도 불안하게 되어 귀국을 결심하고 12월 21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전력 때문에 일경의 감시 하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바야흐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는 ‘정치의 계절’이 되었다. 서산은 친분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육자의 길을 택했다. 고려대학교로 오라는 김성수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흥사단 동지 김윤경의 권유로 모교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교수 인력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학과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문과대 학장 등의 보직을 맡아 보면서 교육에 전심하는 동안 교환교수로 미국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시찰하고, 한불협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프랑스와의 민간외교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언제나 사명감을 가지고 원리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총장의 독단과 재산관리자의 부정, 학생의 부정입학 등 불합리한 학교운영과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서산은 1949년 교무처장 재직 당시 학력을 속이고 부정입학한 31명을 퇴학시켰고, 그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1950년 6‧25가 발발했을 때, 연세대학교는 북한의 내무서원이 점령했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서산은 학교에 은신하고 있었다. 앞서 퇴학당하여 앙심을 품고 있던 조영식이란 자가 공산군의 앞잡이가 되어 서산을 인민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밤에 연세대 구내에 있는 선교사의 집에 들어가 값진 물건들을 훔쳐 산을 넘다가 북한군에 발각되어 즉석에서 총살을 당하여 서산은 위기를 모면했다.
1960년 4월 19일 서산은 시위 학생들과 함께 경무대 앞까지 갔고, 경찰의 총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목격했다. 자칫 독재정부가 전력을 정비하여 반격을 가하면 학생들의 피가 헛되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서산은 고려대학교 이은상‧이종우 교수와 은밀히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4월 25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200여 명의 교수가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사상 유례가 없는 교수들의 가두시위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자유당 독재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서산은 대학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개선하기 위하여 연세대학교 학원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5‧16쿠데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1년 9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의하여 교수의 정년도 65세에서 60세로 단축됨에 따라 이미 60세가 넘은 이용설, 김윤경 등과 함께 그 역시 퇴직을 당했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는 유럽철학을 한국에 소개한 선구자요 개척자로 평가된다. 번역서로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무어의 『윤리학 원리』 그리고 저서로 『진리와 그 주변』을 남겼다.
“사적인 대담에서는 호방하리만치 인간미 넘치는 선생이 싸늘하고도 차디찬 모습으로 일변하는 건 공적인 일에 임할 때이다. 변칙을 싫어하다 못해 거기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혐오감을 갖는 선생은 때가 어느 때건 자리가 어디건 간에 주위를 경악케 하는 언설을 쏟아 놓는다.” 평생을 가까이 한 제자의 말이다.
4‧19 직후 프랑스 대사로 거론되었을 때, 그는 “프랑스 유학시절의 나는 거지나 다름없었소. 대사란 그 나라의 얼굴인데 거지가 대사로 왔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하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작은 공도 침소봉대하여 과실을 챙기려는 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서산 정석해! 그의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서 ‘행동하는 지성인’의 참모습과 진정한 ‘선비정신의 계승자’의 면모를 보게 된다. 시대를 초월하여 흥사단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이 아닐까?
- 글 : 박의수(강남대 명예교수/ 흥사단 공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