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용강에서 출생한 하희옥<1890-1978>선생은 평양 대성중학교에서 도산 안창호<1978-1938> 스승에게 덕체지(德.体.知) 삼육교육을 받은 제자이다. 흥사단 목적과 4대 정신을 88세로 별세하시기까지, 한 평생 실천한 흥사단의 존경받는 모범 단우이다. 일찍이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1912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만주에서는 아동교육에 힘쓰며 애국단체인 간민회(懇民會)에서 독립투쟁을 했다. 무관학교에도 입교했으나 뜻에 맞지 않아 중도에 나왔다. 이후에,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학과 직업에 목표를 두고 1916년에 한병선, 백낙준 단우와 함께 배편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학업을 뒤로 미루고 생계 때문에 포도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다가 1917년 7월에 로스엔젤레스에서 장리욱<1895-1983> 단우를 만났다. 단우로서 정의돈수 중에 도산 스승을 뵙는 기쁨도 맞이했다. 도산 스승은 제자 하희옥을 반가이 맞으며 흥사단 목적인 약법과 강령사상 등에 대하여 설명해 준 후에 흥사단 입단을 권면하셨다.
하희옥 선생은 도산 스승의 입단 문답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 엄격한 세 번의 입단 문답에 합격을 하고 하희옥 선생은 단우번호 79번을 받으며, 흥사단 입단의 기쁨을 안게 됐다. 1917년 8월에 먼저 입단한 최희송<1894-1982>단우는 단우 번호가 70번으로 하희옥 단우와는 미주위원부 서무원직을 모두 경험한, 형제처럼 가까운 단우였다.
미국에 정착한 하희옥 선생은 학업보다 사업에 진출하여 뉴욕, 시카코,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인산스<향료> 생산과 판매로 성공을 이루었다. 이 사업은 광복 후인 1947년에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오클랜드로 집을 옮겨 살았다. 1949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흥사단 미주대회에 참석하고 서무원<총무>으로 뽑혔다. 1950년 1월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모든 업무에 헌신적으로 일했다. 김재순 선배 단우는 학생 때와 국회의원 시절, 미국에 갔을 때 하희옥 선생을 만나 크게 도움받은 일을 자주 말하곤 했다. 그리고 민주당 정부 시기, 주미대사였던 장리욱<1895-1983>박사도 5.16군사정변으로 갑자기 대사직을 그만두고 고난을 겪을 때, 하희옥 선생은 단우로서 장리욱 박사의 어려움을 해결해 드렸다. 하희옥 선생은 단우 간의 정의돈수가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50년 6.25사변으로 피해입은 국내 단우들을 돕기 위해 하희옥 선생은 서무원 책임 단우로서 헌신적으로 준비한 구제금 및 구호품을 한국 흥사단 본부로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 흥사단 경상도 지부를 창립한 대표 송종익<1887-1956>단우와 상의하여 일을 잘 진행해 갔다. 환도 이후에는, 명동 대성빌딩의 흥사단 강당에 필요한 의자 350개와 피아노까지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흥사단이 발행하는 <새벽>이라는 잡지의 후원금도 매달 250불씩, 발행인인 장리욱 단우에게 보내 주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하희옥 선생의 투철한 애단 정신과 모범 단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따뜻했던 멘토 송종익 단우의 별세는 하희옥 선생의 큰 슬픔이 되었다. 여기에, 미주 흥사단 서무원 자리에 김대연 군(최희송 단우의 추천)을 임명했으나 업무 인계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한동안 쓸쓸한 슬픔도 느꼈다.
선배 단우인 송주방 목사는 미국에서 잠시 사는 동안 흥사단 애국가작사규명위원회의 어느 모임에서 하희옥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도산은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 가사지를 20불과 함께 안익태 음학도에게 전하며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인데도 흥사단 창립, 108주년이 지나도록 국가 공인을 받지 못하고, 이를 위해 지금도 연구하며 노력 중인 것이 안타깝다. 하희옥 선생과 구익균<1908-2013>단우가 애국가 작사자를 도산으로 밝혀 주었으니,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이라는 국가 공인을 받기 위해 흥사단 전체가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한다.
하희옥 선생은 재혼한 아내인 최재문이 별세하자 고독에 잠겨 삶이 괴로웠다. 조국에서 겨레를 사랑하며 단우 활동을 하기 위해 55년간 살아온 미국을 등지고 1967년에 귀국했다. 이후, 국내 단우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휴면단우 심방, 청소년수련관 건립기금모금 활동을 하며 단 발전에 땀을 쏟았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백영엽<1892-1973> 목사의 주례로 김선량<1899-1984> 단우의 초등학교 동창인 김경숙 여사와 1968년에 결혼했다. 다시 가정을 이룬 것이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청년과 학생을 사랑하신 도산 스승처럼 하희옥 선생도 청년과 학생을 사랑했다. 1967년 <기러기> 8월호에 하희옥 선생의 글이 실렸다. 선생은 글에서 청년들에게 “청년은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며 일해야 한다. 입단 시에 서약한 4대 정신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 담배는 끊고 단우 생활을 밝게 잘해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청주지부 흥사단 고교생이 인생 문제를 편지로 1978년 12월 2일 자로 보냈을 때, 하희옥 단우는 “사람을 믿으면 실망이 크다. 단 이념을 믿고 도산 선생님 말씀을 믿으라 자네가 제2의 도산이 되어 단과 민족을 이끌어가는 큰 지도자가 되어라.”라고 회답하며 고교생 단우 앞길에 인자하게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 청년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말씀을 아래와 같이 주셨다. 첫째, 5대 공약을 지키자. 둘째, 단의 집회에 참여하자. 셋째, 금전의무에 충실하라. 넷째, 기관지를 구람하자. 다섯째, 다수의 의견에 순응하자. 하희옥 선생은 흥사단 청년이 할 일을 이렇게 다섯 가지로 일깨워 주셨다. 당시, <하희옥 선생 추모좌담회>에 참여했던 청년 이대형 단우는 “인자하게 격려하시는 선생님의 눈길이 가슴속까지 찌르는 것 같아 감격하였습니다.”라고 하희옥 선생의 말씀에 느낀 감동을 회고하며 말했다.
그처럼 흥사단을 끔찍이 사랑하시던 하희옥 선생이 1978년 12월 7일에 돌아가시어 경기도 용인의 용인공원묘지에 묻혔다. 도시개발 공사로 산소가 근처 산기슭에 초라하게 이장되어 있었으나, 흥사단에서는 살펴본 일이 없는 듯하다. 일생을 단을 위해 충성하며 봉사하신 모범 단우 하희옥 선생 별세 이후에, 무덤 관리에 무관심했던 우리 단우들은 그 수치스러운 잘못을 깊이 반성해야 하겠다. 한 독립운동가의 초라한 무덤을 문화방송 실사탐사대가 탐사하여 푸대접받는 독립운동가의 허술한 무덤을 보도하고 흥사단에 연락하여 그 전기를 쓴 나에게도 대담 요청이 왔다. 나는 송주방, 김태석, 반재철 단우를 추천하여, 문화방송 실사탐사대가 요구하는 대로 흥사단 강당에서 함께 대담을 녹화했다. 반재철 단우가 미국 장철우 단우와 연락되어 유족 연고자로 외손녀인 김영주 씨를 찾아냈다.
흥사단의 네 분의 단우와 진행한 대담이, 2020년 10월 24일 문화방송을 통해 전국에 보도되었다. 보훈처는 2015년 추서했던 하희옥 선생의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연고자가 없어 보관해 오다가, 미국에 거주하는 외손녀 김영주에게 지난 2월 23일에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보훈처는 3월 3일에 하희옥 선생 유해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5번 485호 자리에 안장했다. 조선일보는 3월 3일 자에, 하희옥 선생 산소의 이장 장례 기사에서, 하희옥 선생은 일본강점기 30여 년간 미국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뉴욕, 시카코, 애크런 등에서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통해 독립애국단체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날, 하희옥 단우 대전현충원 안장식에는 흥사단 단우로 서울에서 송주방, 김태석, 반재철, 김시관, 김용국, 박만규, 문성근, 이갑준 등 10여 명, 그리고 대전에서 이용태, 이강웅, 이석동 등 5명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이며 흥사단의 모범 단우로서 투철한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흥사단의 4대 정신을 실천하며, 겨레 흥사단을 빛낸 하희옥 선생의 참된 삶은 영원토록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글 : 전 공의원,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 오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