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8일 제주흥사단 문화 유산답사회의 정기답사를 ‘길 따라 전설 찾아 애월읍’이라는 주제로 다녀왔다. 답 사 전날 제주흥사단 단소에 들러 작성된 답사자료를 먼저 읽었다. 애월읍 하가리, 상가리 그리고 곽지리 마을의 문화유산과 전설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전설이 문화유산과 어떻게 만나는지, 기록에 의 하지 않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문학을 또한 어떻게 인문학으로 소화했는지를 곰 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전통문화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392개소의 신당이 있다고 했다. 오당빌레당(할망당)도 그 중에 하나이 다. 오당빌레당이 있는 하가리에도 4·3 참극이 발생했다. 동네에서 제사를 마치고 음복하고 있던 현장을 폭도 모의로 오인하여 무고한 25명이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그곳에 화해·상생·화합하자는 위령 비를 세운들 얼마나 위무가 될는지…
제를 행하는 하가리의 리사제단이 2010년 재정비되어 말끔하게 우리를 맞았다. 하가리 리사제의 기원이 기록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의의가 크다. 1653년 흉년에 아사자가 속출하자 리사제를 결의하고 장소 와 경비 조달 방법, 제관 12명 선정하고 1659년부터 봉제를 시작했다.
한국전쟁 용사와 4·3 희생자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단이 상가리 마을 높은 곳에 있다. 한국전쟁에 66명이 출 정하여 19명이 사망하였다. 한국전쟁과 4·3의 참극에 희생된 영령이 동백으로 승화되었다는 글이 위령비에 새 겨있다.
피는 피를 부르나
더러는 흙에 스며
이 산하 품에 안고
꽃으로 피어 나리니
뚝뚝 지는 동백이어라
역사의 물줄기는
권력의 고지를 돌아 도도히 흐르리니
비문을 한 줄 한 줄 낭독했다. 고려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을 주민은 강건함과 편안함을 기원하며 살았 다. 그 이외에는 달리 무엇을 바란 것이 없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운암은 원래 명당에 수백년 된 센달나무,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던 곳이다. 4·3에 숲이 타버리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명당의 위치를 잃었지만 하운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여전히 경쾌했다. 4·3 당시 곰방이 동네에 도 계엄군이 토벌 작전하면서 주둔했었다. 상가리 민보단이 구성되어 보초를 섰으며 일부초소는 여자가 지키기 도 했다. 성담 총 길이가 3km에 달했으니 무장대 습격에 대비하는 주민들의 고초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가리사무소가 점유하고 있는 면적이 상당히 넓다. 제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은행나무가 많다. 1956년 재일 교포 변동규씨가 은행나무와 벚나무 200그루를 가져왔다고 한다. 과원에는 수직군이 상주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다가 갑오경장으로 진상제도가 폐지되면서 민간에게 불하하였다. 마을의 민의를 수렴하는 향사 또한 변 동규씨를 중심으로 마련되었지만 지금은 청년회, 부녀회 건물로 바뀌었다. 산간마을 이지만 동동네 방사탑과 섯 동네 방사탑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가리는 고내봉을 중심으로 설촌되었다. 고내봉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봉화군이 주둔하는 곳도 있었다. 고내 봉 기슭에는 흘러내린 물이 고이는 괴양물이 있는데, 서학당의 유생들이 활쏘기를 마치고 쉬면서 마시는 커다란 연못이었다. 서학당은 한응호 제주목사가 1833년 개설했는데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흥학비가 애월농협유통센터 귀퉁이에 알 듯 모를 듯 수줍게 숨어 있다.
문필봉에서 상별례를 하였다. 각자의 답사 소감을 밝혔다.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답사 과정에서 듣지 못한 전문지식이 쏟아졌다. 흥사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독특한 방식의 상별례가 답사에서도 반드 시 필요한 이유이다.
매월 1회, 둘째 주 일요일에 정기답사를 진행한 지 339회가 되었다. 30년을 이어왔 다는 엄청난 기록이 역사성을 가지게 되었 다. 문화유산이 제주흥사단우의 마음에 깊 이 자리 잡았다. 이제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가 30년을 넘어서는 시점에 서있다. 청년 의 마음으로 30년을 달렸다면 앞으로의 30 년은 고영철 회장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전문 지식을 부가하고 확대하면서 달려야 한다.
* 글 : 임영훈(제주지부 부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