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황영식(공의원, (사)기러기문화원 이사장)
이태복 선배님은 저와 영원한 흥사단 단우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사표로 삼았습니다. “당면 난제를 앞에 놓고 선택과 판단이 어려울 때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떠올리면서 고민을 토로하고 결의를 다져왔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삶의 거울로 삼았던 것입니다. 저 역시 이태복 선배님보다 어리지만, 같은 마음이기에 이 선배를 추모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감옥에서 출소 후 부산에 처음 내려오셨을 때 중절모가 참 멋져 도산 안창호 선생님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평생 흥사단 울타리에 저를 가두어 놓고 자아혁신과 게으름에 대한 반성을 밥먹듯이 하면서 살고 있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한 이 선배님의 자세는 저에게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이 선배님은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며 해야 할 과제들을 잘 수행하려면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한번은 보건복지부장관을 하시고 나서 서울역에서 둘이 만났는데, “서양사람들 중 당뇨나 혈압이 있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카푸치노를 개발해서 먹는다”고 하셨습니다. 커피가 우리 몸에 들어가면 칼륨 흡수를 방해하지만 계피가루를 넣어 먹으면 당뇨 있는 분들도 먹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카푸치노를 권해 주셨던 것이 인연이 되어 저는 지금까지 커피점에 가면 카푸치노만 시켜 먹습니다. 계피를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상에 깊숙이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부분 중 하나입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평생 강조하셨던 말씀이고, 독립의 바탕은 오직 힘이라고 하셔서, 저도 통일, 경제, 외교, 민주역량에 대해 늘 되새기곤 합니다.
이태복 선배님도 고 1학년 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면서 푹 빠져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성빌딩 금요강좌를 매주 참여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물되기’에 힘써서 수련카드를 만들어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네 항목으로 나눠 하루 생활을 점검하고, 반성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했고, 몸도 단련하기 위해서 유도부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고 했습니다. 스피치 연습과 동맹독서를 통해서 문제제기, 논쟁 등을 적극적으로 했는데, ‘도산식 대화법’을 연구해서 활용했다고 했습니다. ‘도산식 대화법’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청년들을 흥사단에 가입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일방적인 설교가 아니라, 문제를 하나씩 짚어가서 결론에 도달하는 대화방식인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소크라테스의 방식을 원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태복 선배님이 경제, 정치, 사회, 역사 외에도 문학, 음악, 미술사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흥사단 토론주제들이 민주주의, 민족주의, 한국사회의 현실문제, 외국의 민족운동, 일제하의 독립운동, 순수와 참여문학 논쟁, 청년학생의 사명, 역사와 예술 등 다양한 주제들이었기에 차근차근 ‘인물되기’ 훈련을 쌓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암울했던 긴급조치 이후에 출판사 광민사를 만들어 『노동의 역사』, 『노동의 철학』 등 노동신서나 『유한계급론』 등 사회과학책 못지않게 『쟝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등을 번역출판한 까닭도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총체적인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함을 알고 실천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흥사단우들은 대부분 민족주의자, 통일을 목표로 두고 그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역량은 과연 무엇일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항상 민족분열을 가장 경계하셨고, 독립운동역사에서 좌우파를 비롯해 온갖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일관되게 통일단결이라는 실천론을 고수하면서 온몸과 마음을 바치셨습니다.
이태복 선배님도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통일이라고 했고, 그 힘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합을 강조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활로찾기』라는 책 속에는 그런 고민과 노력의 흔적들이 많이 보입니다. “분열을 극복하고 한 덩어리로 만드는 문제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당면대책에 힘을 모으자. 치욕적인 역사는 다 까닭이 있으니, 갈등은 얼마든지 조율할 여지가 많다”, “객관적 현실에 근거해서 정책경쟁과 건설적인 대안제시를 하자. 그것이 국민통합과 단결을 위한 필수요소다”며, ‘민생으뜸’, ‘국민통합’, ‘선진강국’, ‘조국통일’ 4개의 깃발을 들자고 주장했습니다. 흥사단 단우들이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정신이 녹아서 21세기에 ‘청년 안창호 이태복’을 만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평전』은 이태복 선배님이 울면서 집필한 책이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래 전주교도소에 있을 1983년, 감옥에 들어온 후배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잘못 이해하고 지극히 편향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학습에 참고가 되게 써야겠다고 했는데, 볼펜과 노트를 회수당해 집필할 수가 없어서 23년만인 2006년에 와서야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태복 선배가 역사광장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불러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까닭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야말로, 굶어죽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싸워 이기는 독립운동, 공리공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을 무실역행하는 운동, 풍부한 독립운동방략을 갖고 ‘인물 기르기’ 실천한 운동 그리고 통일단결과 통합의 리더십이 지금 시대에 가장 절실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읽혀져서 교육할 때마다 행사할 때마다 이 선배님이 쓴 『도산 안창호 평전』을 소개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태복 선배님이 5년 넘도록 매주 쓰셨던 새벽편지에 ‘항일근거지 밀산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글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흥사단 전신인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항일독립운동 근거지로 흑룡강성 밀산을 택하셨습니다. 러시아, 중국 국경이 마주친 북만주땅 봉밀산 지역은 1908년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비롯해서 한말의 애국지사들의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미주국민회를 통해 모금작업을 시작해서 거금 5만 달러를 모아 3백만평의 토지를 매입해서 5백여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동명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힘을 쏟았던 곳입니다.
이태복 선배님은 이 사실을 『도산 안창호 평전』을 쓰면서 알게 되었고, 2008년 중국동포 청소년 복지 프로그램 때문에 방문했다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워 애국지사들의 염원을 이어받아 뜻을 살려나갈 이들의 참여를 고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이 선배님은 국내에서 10분을 모아 1천만원을 모금, 2009년에 밀산시 십리와에 최초의 한글비문이자 항일유적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천리먼길 밀산에서 고군분투했던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영원히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것에 대해 부끄럽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 함께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 선배님은 서일장군을 비롯,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창천 선생 등 이곳에서 활동했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는 말도 자주 했었습니다.
이태복 선배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주장한 경제역량 강화에 대해서도 많은 실천을 했습니다. 독과점 가격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해서 5대거품빼기운동도 벌였고, 경제민주화 1호기업인 국민석유 설립운동 캠페인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도 사)5대운동의 이사로 함께 동참 활동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후예임을 새삼 확인할 때가 많았습니다.
고인이 된 이태복 선배님은 그가 쓴 『도산 안창호 평전』에서 ‘도산의 삶을 진정으로 본받기 원한다면 우리의 나태와 자기기만, 타락을 참회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일대 자기혁신에 철저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저절로 이뤄지는 역사는 없다. 피와 땀과 눈물이 넘쳐나야 조국통일의 큰 길이 열리고, 복된 나라의 꿈도 현실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국민들도 뜻있는 이들의 말과 몸짓을 신뢰하고 그 깃발 아래에 모여들 것이다’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청년 도산 이태복, 선배이자 동지가 몹시도 그립습니다. 삼가 명복을 빌며, 영면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