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신주백(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광복절을 기해 ‘특별사면’을 실시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사면은 1948년 9월 처음 실시된 이래 최근의 박근혜 대통령까지 100여 차례 이상 있었다. 그 중 광복절 특별사면은 1952년부터 23회 있었다. ‘해방=정부수립=독립’을 기념하는 광복절에 국민통합 차원에서 특별사면을 실시한 역사가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특별사면에 관한 이야기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1. 중층적 집단기억의 형성
그렇다고 역대 정부가 모든 기념일에 빈번하게 특별사면을 단행한 것은 아니다. 3·1절과 제헌절 때도 있었고, 부처님 오신 날이나 성탄절 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드문 일이었다. 광복절 때만큼 특별사면을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단행한 기념일은 없었다. 광복절 특사가 없었던 노태우, 문재인 정부 때를 제외하면 평균 2.8년에 한 차례씩 광복절 특멸사면이 있을 정도였다.
근대 국민국가에서 기념일은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이자 매우 자연스러운 정치행위이다. 8월 15일은 민족에 바탕을 둔 국민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시공간적 경계선을 그어준 날이었다. 나이, 성별, 빈부, 지위를 불문하고 한반도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의 역사, 달리 말하면 민족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날이었다. 그런 날을 기념한 광복절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의 유래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낼 최고의 기념일이다.
8월 15일은 북한에게도 중요한 날이다. ‘사회주의 7대 명절’에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은 없지만 8월 15일을 ‘해방기념일’로 제정해 두고 있다. 김일성 생일(4.15), 김정일 생일(2.16), 정권창건일(9.9), 당창건일(10.10)처럼 ‘혁명전통 기념일’ 일색인데 해방기념일만 결이 다른 기념일이다.
광복절과 해방기념일. 비록 기념일의 명칭은 다르지만 8월 15일은 남북한 당국이 제정한 기념일 가운데 유일하게 일치하는 날이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구성원이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확인한 날이자 함께 새 출발하는 날이었으므로 남북한 당국 어느 쪽도 홀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단된 이후에도 각자의 내부 사회에서 그날의 상징성이 여전히 정치적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남북한 당국 모두 더더욱 의미 있게 활용해 왔다.
그래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8·15기념사에서 진정한 광복을 실현하는 통일국가 수립을 핵심 주제로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모든 대통령이 현재의 분단체제가 ‘불완전한 광복’임을 인정했다. 그러니 완전한 광복을 위해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는 구상을 재임기간의 기념사에서 꼭 밝혔다.
그중에서도 1970년 8·15기념사는 이전과 좀 달랐다. 남북한의 대결보다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 수 있게 여건을 만드는지 선의의 경쟁을 해보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대결적이고 적대적이 않은 주장을 담은 첫 기념사였다. 한국사회에서 평화통일이란 말은 이후부터 북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1960년 8·15 15주년 기념연설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 실시를 통한 과도적 연방제’를 제안했다. 과도적 연방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에서는 8·15기념에 대한 비중이 약해져 갔다. 특히 1974년 이후 ‘혁명전통 기념일’을 8·15해방기념일보다 더 중요시했다. 김일성 중심의 항일유격대 역사에 그의 가족의 영웅적 투쟁을 얹혀 주체의 역사란 서사를 완성한 결과였다. 북한 나름대로 해방과 독립을 전유(專有, appropriation)한 것이다.
한국에서 8·15광복절은 1980년대 후반에 새로운 정치공간을 열었다.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이 일어나 1990년 광복절 때 서울과 판문점에서 제1차 범민족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1990년대 내내 교류가 이어졌다. 한국에서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정세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광복절이 정치적 의례의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고 남북한 사람이 직접 교류하며 통일지향적 자세를 가다듬는 정치공간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8·15광복절은 시간이 지나며 해방과 독립을 기억하는 기념일에 더하여 남북관계를 생각하고 정책과 행동으로 대안을 찾아보는 상징적 기념일이라는 의미까지 두텁게 쌓여왔다. 3·1절과 마찬가지로 해방과 독립 그리고 민족이란 공통분모에서 출발한 기념일이지만 오늘에 와서 보니 남북한 기념일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광복절만의 정치공간이 만들어졌다. 또 다른 차원의 집단기억(Collected)이 형성된 것이다.
원래 집단기억은 개인 기억들의 교집합 부분을 의미하는 ‘집합기억(Collective)’과 확연히 다른 기억이다. 집단기억은 집합기억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개인의 기억과도 다를 수 있고, 개별 사실과도 다를 수 있으며, 그 기억 자체가 하나의 신념 체계로서 독립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면서 집단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기억이다. 다시 창조되는 기억은 개인 기억의 총합이 아닌 것이다.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가고 있던 광복절만의 정치공간이 이를 가장 적절히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2. 기억의 균열과 다양한 미래 기억
그런데 광복절의 중층적 기억을 보강하거나 균열을 일으키는 역사도 동시에 있었다. 물론 전쟁과 분단 고착화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 8·15기억이 왜소해지고 파편화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주변 국가를 살펴볼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이행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이 기억을 새롭게 다듬어 갈 기회가 왔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국민적 저항이 일어난 1987년 8월 독립기념관이 개관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8월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며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다. 일부 유물은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다. 8·15광복절을 매개로 식민에 관한 기억을 강력히 소환하고 독립에 관한 기억을 새롭고 확장적인 방향에서 다듬어 갈 공간적인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정통론과 독립전쟁론의 외연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면서 8.15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 지고 있다.
8·15를 둘러싼 정형화된 기억의 변화는 국가나 개인 사이의 편차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상대화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일본에게 8·15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지 않고 가해와 피해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며 평화를 말하는 ‘종전기념일’이다. 하지만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날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오키나와현은 우시지마 미쓰루 제32군 사령관이 자결한 6월 23일을 ‘위령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대신에 8월 15일은 기념일이 아니다. 국제법으로도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날(8월 14일)이나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9월 2일)도 아니어서 애매한 날일뿐이다.
오키나와현처럼 중국과 대만에서도 8월 15일은 기념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이 아니라 소련의 날짜 계산에 따라 9월 3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사회가 대만처럼 8월 15일을 평범한 날로 간주하고 있지도 않다. 역사교과서에서조차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중국이 승리했다고 쓰여 있으며, 8월 15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자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정부의 공식 기념일이 아닐 뿐인 것이다.
대만의 타이뻬이에 진주한 국민당군은 1945년 10월 25일 대만군과 대만총독부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대만사회는 그날을 ‘광복절’로 기념해 왔다. 하지만 대만독립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2001년 국경일을 폐지했다. 그들에게 10월 25일은 국민당이란 외래정권이 통치를 시작한 날이다. 주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역사관의 전복(顚覆)이 일어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개인별 8·15기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황의 항복방송을 듣자마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해방을 기뻐하는 이미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8월 15일 항복방송을 들었거나 곧장 전해들은 사람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그날 거리에서 기쁨의 행진을 감행한 군중은 없었지만, 대도시 평양과 대구, 시골인 전남 장성 등지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보다 5일이나 앞선 8월 10일 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사실을 안 사람도 있었다(서안의 한국광복군, 중경의 한인들). 소련군이 청진상륙작전을 감행한 12일 이후 해방된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16일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도 있었다. 산속이나 왜진 곳에 있어 해방 소식을 18일이나 19일에 들은 사람도 있었다.
해방의 기쁨은 한반도 구성원 사이에 1주일 이상의 시간차로 표출된 것이다. 때문에 ‘나의 해방’은 국가의 기억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획일화를 거부하고 진정으로 민주화된 사회이다.
국가간 개인간 또는 국가와 개인의 편차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8·15기억에 균열을 냄으로써 복수(複數)의 역사를 만들 바탕을 제공한다. 또 8·15를 둘러싼 국가간 기억과 기념의 편차를 확인하고 참다운 의미를 포착하는 노력은 동아시아의 식민주의를 청산함으로써 다자간 역사적 연대의 바탕을 마련할 자산이다. 기억은 퇴적되어 보관되지 않고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화해 가는 유기체로서 과거의 존재를 불러 미래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전쟁의 파장과 국내정치의 리더십 상실이 겹치며 미래를 말하기 쉽지 않은 이때, 이번 광복절 기념사는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말하며 기억을 만들어줄까. 우리 각자는 어떤 광복절을 만들어 갈까.
* 이 글은 <<경향신문>> 2022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신주백의 史淵’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