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대공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 대공주의 논의 과정
1980년 이후 단내에서는 도산의 대공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대공주의에 대한 논의가 전면에 부상된 것은 구익균 단우의 대담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한 글 ‘도산 선생의 대공주의사상’이 『기러기』(1980년 6월호)에 게재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박만규 단우의 논문 『도산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대한 일 고찰』(『한국사론』 26, 1991, 국사편찬위원회)이 발표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만규 단우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학계에서는 유병용(1995), 김신일(1997), 김기승(2012), 장석흥(2014), 박상유(2015), 박병철(2017) 등 여러 연구자들이 도산의 대공주의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 도산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몇몇 논저(이명화 2002, 강영현 2003)들 속에서 도산의 대공주의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외에도 도산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 평전들 속에도 단편적이나마 도산의 대공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단 내에서도 몇몇 단우들이 대공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진지한 논의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도산 사상을 체계화하고 심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값진 노력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대공주의에 대한 두 가지 쟁점
대공주의는 많은 연구자들이 도산 사상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정작 도산 자신은 1931년 미주의 홍언 단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단 한 차례 대공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다. 그래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공주의의 해석을 두고 다소의 혼란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산의 대공주의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는 내용면에서 크게 두 가지 쟁점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대공주의를 1920년대 독립운동 노선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소아적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대국적 견지에서 함께 힘을 합치자는 애국적 통합정신, 혹은 대동단결론으로 보는 견해이고, 둘째는 대공주의를 확대해석하여 독립운동의 방략뿐만 아니라 독립 후의 국가건설 구상, 더 나아가서는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방침까지를 아우르는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經世論)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도산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용어에 대해서는 반드시 쉬운 말로 그 의미를 명쾌하게 규정하고 사용한다. 그럼에도 대공주의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진술한 바가 없다. 그렇다면 도산의 마음속에 있는 ‘대공(大公)’은 ‘소아(小我’에 대응하는 매우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갈등하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통일하기 위하여 자기주장(小我)에 집착하지 말고 민족독립이라는 보다 큰 사업(大公)을 위해 일치단결하자는 도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대공주의’라 명명하는 것은 대공의 상식적 의미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도덕적 가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모든 연구자들이 예외 없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대공주의를 애국적 통합정신, 혹은 대동단결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방법론, 독립 후의 국가건설 구상, 더 나아가서는 대외적인 외교방략까지를 아우르는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經世論)으로 확대해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박만규 단우의 논문이 그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이후에 저술된 여러 편의 논문과 도산평전에서 진지한 검토 없이 이 견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최근 단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공주의 연구모임에서도 이러한 논리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3. 대공주의를 종합적 경세론으로 보는 견해의 문제점
대공주의를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논리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칫 대공주의의 의미가 희석되고 도산 사상의 체계가 비논리적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첫째, 도산이 어느 자리에서도 대공주의를 자신의 경세론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언급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는 내용을 추론에 의존하여 해석하는 경우에는 자료의 선택과 해석에 매우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료의 선택이 적절하지 못하거나 자료의 해석이 논리적이지 못하면 사실을 호도할 위험이 있다. 최근 도산의 대공주의를 구체적인 논증 없이 그의 대표적인 경세론으로 확대해서 해석하고자 하는 논의에서 이러한 우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둘째, 대공주의를 평등론을 비롯한 도산의 경세론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논거로 제시한 1931년 미주의 홍언 단우에게 보낸 편지글에 대한 해석이 매우 자의적이고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그 편지글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독립운동의 투쟁 대상은 오직 일본제국주의이다.
②투쟁의 수단으로 소극적 반항과 적극적 폭력 파괴를 병행한다.
③해방 후 경제·정치·교육을 평등하게 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④일보를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에 ‘대공주의’를 실현한다.
이 글은 당시 도산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본원칙을 간략하게 피력한 것으로 네 가지 원칙은 각각 독립성을 갖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세론자들은 네 번째 원칙 속에 언급된 대공주의라는 용어를 보고 대공주의를 네 가지 원칙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매우 자의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특히 도산이 간단하게 언급한 평등론을 대공주의의 주요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평등론을 대공주의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대공주의는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이며, 평등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당연시하고 있다. 도산이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도 없고, 학계에서도 그 의미가 너무 다양하여 한 두 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는 평등의 개념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도산을 사회(민주)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고 자의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도산이 경제·정치·교육을 평등하게 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겠다고 한 것은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하며, 최소한의 교육기회를 국가가 제공해야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구상은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견해를 대공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생각된다.
넷째, 네 가지 원칙 전부를 대공주의로 해석한다면 위 편지글의 ④항은 일본제국주의를 주적으로 하고, 소극적 투쟁과 적극적 파괴운동을 병행하며, 정치·경제·교육을 평등하게 하는 민주국가의 건설을 전 세계 인류에게 실현할 것을 촉구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도 무리한 주장이다. 다른 나라를 향해 이러한 주장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 세계 인류에게 대공주의를 실현’하게 한다는 것은 대공주의의 원래의 의미에 맞추어 ‘자국의 이익(소아)에 집착하지 말고 각 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보호하여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대공)의 실현’에 기여하자는 선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한다.
대공주의를 도산의 경세론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각기 강조하는 바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강영현(2003), 김기승(2012), 장석흥(2014) 등이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바가 있다.
4. 맺는 말
온 국민이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 나라의 미래를 건설하는 구상을 경세론이라고 한다면 도산의 경세론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드높이기 위한 민성혁신론,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략, 독립 후의 민주공화국 건설 구상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며, 민족대통합을 이루기 위한 대공주의 역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산의 대공주의는 경세론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며,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도산의 대공주의를 경세론 그 자체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며, 도산의 사상적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위축시키고 궁색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주요 참고문헌>
강영현(2003), 『무실과 역행을 넘어서』, 경인문화사.
구익균(1980), 도산 선생의 대공주의 사상, 『기러기』 1980년 6월호, 흥사단본부.
김기승(2015), 도산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조소앙의 삼균주의 비교 연구, 『도산학연구』 제14·15집, 도산학회.
김신일(1997), 민족통일 방략으로서 안창호의 통일노선과 대공주의 해석, 『도산사상연구』 제4집, 도산사상연구회.
박만규(1991), 도산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대한 일 고찰, 『한국사론』 26, 국사편찬위원회.
박만규(2018),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관한 두 가지 쟁점, 『독립운동사연구』 6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박병철(2017), 도산 안창호의 민족운동: 무실역행과 대공주의, 『민족사상』 11-1, 한국민족사상학회.
박상유(2015), 도산 안창호의 민족운동과 대공주의, 『민족사상』 9-2, 한국민족사상학회.
유병용(1995), 대공주의 정치사상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 2, 한국근현대사학회.
이명화(2002),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노선』, 경인문화사.
이창걸(2014), 도산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현대적 해석 및 적용, 『제2회 흥사단시민사회포럼』, 흥사단시민사회연구소.
장석흥(2014), 차리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 글 : 이창기(공의원, 영남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