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애타 : 안창호의 삶과 사상
어떤 동기로 썼는가?
함석헌은 늘 자신의 스승들로서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을 내세우며 존경하였다. 나는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함석헌의 사상은 도산, 남강과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창호의 교육이념과 정신을 따라서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웠다. 이승훈이 3·1운동에 앞장섰을 때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이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씨알사상을 형성하였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과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내가 품은 가장 큰 의문은 어떻게 해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나’를 중심과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철학과 종교 사상의 전통에서도 어떤 철학가와 도덕가에게서도 유영모와 함석헌처럼 ‘나’를 앞세우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교는 극기(克己)와 수기(修己)를 말함으로써 나를 누르고 닦으려 했고, 도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내세우며 나를 자연의 법도와 질서에 순응케 하였다. 불교는 무아(無我)와 멸아(滅我)를 말하여 나를 부정하고 초월하려 하였다. 기독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했으므로 무력한 자아를 구원할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나를 앞세울 수 없었다. 인간의 자아를 이성으로 본 서양의 이성철학에서는 자아와 타자가 모두 이성의 지배와 독점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억압하고 통제했던 이성철학은 주체로서의 나를 내세우기 어려웠다. 탈현대주의는 지배하고 독점하는 이성철학의 관념적 자아를 해체하고 욕망과 감정을 존중하는 우연과 차이의 다양한 세계를 강조했다.
그런데 안창호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유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에 대한 나의 의문은 깨끗이 풀렸다. 안창호는 시 종일관 나를 중심에 놓고 전면에 내세웠다. 안창호는 나라를 잃고 종살이하는 한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나라의 독립과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중 심에 놓고 생각하고 행동한 안창호는 ‘나’의 철학자였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씨알철학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안창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4~5년 전부터 안창호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3년 전쯤 서울대 철학과 동기인 정무형 교수가 나를 윤창희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에게 소개하였다. 윤위원장은 10여 년 전부터 안창호가 한국민족과 세계를 위해 철학과 사상을 형성했다는 신념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었다. 2년 이상 윤위원장과 나는 안창호의 사상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안창호의 가장 친밀한 제자 장리욱이 쓴 『도산의 인격과 생애』란 책을 함께 읽으며 미국 흥사단의 단우들과 오랫동안 생각을 나누었다. 윤위원장은 내게 미국 도산사상연구소 고문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으며 나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미국 흥사단 단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안창호 사상에 대한 나의 생각은 더욱 깊어졌고 확실해졌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을 거쳐서 이번에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이란 책을 내게 되었다.
어떤 관점에서 썼는가?
나는 이 책을 생명철학과 한국근현대의 관점에서 썼다. 도산은 대학에서 책을 가지고 공부하며 사상과 철학을 형성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깊이 했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은 그 자신의 삶과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의 생명과 정신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체험하고 터득하고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닦아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과 정신에 진실하고 철저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잃고 고통에 빠진 한국 근현대 역사의 중심과 선봉에서 혼신을 다해서 치열하게 헌신적으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과 철학은 생명과 정신의 진리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을 드러내고 실현하였다.
어떤 내용을 썼는가?
1) 도산의 삶
도산은 한국 근현대의 중심과 선봉에서 시대정신을 밝히고 실현한 사람이다. 한국 근현대의 시대정신은 민주, 통일(통합), 과학기술, 세계보편의 정신이다. 도산은 쾌재정의 연설에서 민중과 하나로 되어 민중과 함께 깨어 일어나는 체험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유학공부를 중단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일어서는 공립정신을 확립하였다.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함으로써 민주공화의 정신을 확립하고 실현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교육독립운동을 벌였다. 도산은 애국가를 짓고 함께 부르면서 한민족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하였다. 흥사단을 만들고 대한인국민회를 이끌면서 한민족이 함께 일어나도록 이끌었다. 도산의 일생은 민주와 통일의 정신으로 사무쳐 있었다.
도산은 한민족의 가슴에 민주정신과 통일 정신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이미 도산은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은 한민족이 함께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운동이다. 도산이 심은 민주와 통일의 불씨들이 삼일운동에서 크게 타올랐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줄기차게 민중이 불의와 억압에 맞서 함께 일어서게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고 정신과 기풍을 확립한 것은 도산이다. 도산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낳은 사람이다. 도산은 대한민국 헌법(전문) 정신을 형성한 사람이다. 도산은 전문적인 기술과 기예를 익힐 것을 강조하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도자기 회사를 만들고, 서점을 운영하고, 북미실업회사를 운영함으로써 경제와 산업의 자립을 추구하였다. 그는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중시했으며 현실적인 힘과 역량을 강조하였다. 민주공화의 정신과 무실역행의 과학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을 교육한 도산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위한 한민족의 정신적 기초와 자격을 확립했다. 한국정신문화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서양의 정신기술문화를 잘 받아들여 한국현대사회의 시대정신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도산은 대한민국 문명의 초석을 놓은 이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좋은 점, 자랑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 뿌리와 씨앗은 도산의 삶과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부끄럽고 못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도산의 삶과 정신을 외면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도산의 사상
인류사에서 근현대는 민주혁명과 과학혁명을 이룩한 시대다. 근현대의 인간은 인생과 역사, 사회와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저마다 저답게 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또한 과학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여 자신과 세상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도덕과 정신, 얼과 혼의 깊이와 높이를 가져야 한다. 서양의 근현대는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확립했으나 과학적 합리적 사고와 종교도덕의 깊이를 통합하지 못했다. 서양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이성철학과 기독교신앙의 영적 깊이를 통합하지 못하였다.
인생과 역사의 주인과 주체로서 개성과 창의를 가지고 저마다 제 삶을 저답게 살아가는 근현대의 인간은 전체의 통합을 강조한 고대와 중세의 합일적 신비적 가르침을 넘어서야 한다. 도산은 합일과 통합을 강조하면서도 자아의 혁신을 추구하여 자아를 새롭고 힘 있게 하였다. 도산은 동서의 정신문화를 통합하였을 뿐 아니라 과학적 합리적 사고와 종교 도덕적 깊이를 통합하였다. 도산은 새 시대의 정신적 기초를 놓았다.
도산의 사상을 깊이 살펴보면 여러 요소들이 역동적이면서도 정교하고 치밀하게 유기체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사상의 중심에는 애기애타의 원리가 있다. 애기애타는 자아혁신과 협동 사이에 있다. 자아 혁신을 통해 삼대육과 사대정신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확립할 때 비로소 애기애타의 삶을 살 수 있다. 애기애타를 실천할 수 있을 때 협동의 삶을 살 수 있다.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협동의 삶을 살 때 민주공화의 나라를 이루어 문명하고 부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도산은 애기애타를 爱己爱他로 썼다. 애를 愛로 쓰지 않고 爱로 썼다. 愛는 마음 心과 천천히걸을쇠발 夊을 담은 글자인데 爱는 벗 友를 담은 글자다. 愛는 욕망과 감정과 주장을 가지고 대상에 집착하는 심리적 사랑이다. 이러한 심리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높고 맑은 뜻을 가지고 사귀는 친구와 동지의 사랑을 생각했기 때문에 도산은 爱를 썼던 것이다. 친구와 동지의 사랑은 대등하고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나와 남(타인)을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존중하는 사랑이다. 도산의 애기애타는 나와 남을 주체 ‘나’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원리다. 주체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살리고 크게 길러주는 것이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애기애타에서 애타도 남의 주체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므로 ‘애기’라고 할 수 있다. 도산의 애기애타 사상은 애기에서 시작하여 애기로 끝난다. 그러나 도산의 애기사상은 심리적인 자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애기애타는 민주와 통일의 원리이고 근거이며 목적이다. 애기애타의 정신이 없다면 민주와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애기애타는 대공사상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애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며 애타는 동지와 친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나라와 세계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연환경과 우주 전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애기는 사적 영역을 나타내고 애타는 공적 영역을 포함한다. 애기와 애타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깊이 통합되어 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혁신하여 덕체지를 기르고 무실, 역행, 충의, 용감한 정신을 기르는 일이다. 도산은 늘 공사병립, 공사병행을 강조함으로써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사적 일과 공적 일을 함께 존중하고 강조하였다. 나를 새롭고 힘 있게 함으로써 조직과 단체의 공고한 단결에 이르고 공고한 단결을 바탕으로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고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바탕으로 세계의 정의와 평화에 이르려 했다. 개인의 나를 힘 있게 함으로써 공의 세계를 열어가는 활사개 공(活私開公)의 철학이 도산사상의 중심에 있다. 도산은 정치경제교육의 평등과 민족의 평등을 바탕으로 건전한 민주공화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세계대공에 이른다고 하였다. 도산은 공사병립, 활사개공, 세계대공의 확고 한 공공철학을 확립하였다.
삼대육과 사대정신을 기르는 자아혁신, 서로 살리고 길러주는 애기애타,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여 서로 구원하고 해방하는 협동과 공립(共立)의 철학은 민주정신과 통일정신을 확립하고 실행하는 공사병립, 활사개공, 세계 대공의 공공철학과 맞물려 있다.
21세기와 도산 사상
자신의 삶과 정신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도산이 스스로 배우고 깨닫고 체험한 진리는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우고 깨달은 진리보다 더 깊고 크다.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간디와 같은 성현들은 모두 자신의 삶과 역사 속에서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이들이다. 자신의 삶과 역사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도산은 20세기의 성현이다. 나는 이 책에서 동서정신문화를 융합하고 민주공화의 정신을 구현하며, ‘나’철학을 확립한 도산의 사상과 정신이 깊고 풍부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시하였다.
이전 시대는 성현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사는 시대다. 그러나 민주혁명과 과학혁명을 일으킨 근·현대는 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제 삶을 제가 살아야 하는 민주시대다. 성현이 아니라 ‘내’가 내 삶과 역사의 주인과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성현의 가르침을 이어서 내가 내 삶을 나답게 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이 민주시대이고 과학의 시대다.
도산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중심과 전면에 놓고 ‘나’를 사랑하는 애기(愛己)의 원칙을 확립하고 ‘나’를 사랑하는 공부를 역설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공(公)과 사(私)를 함께 세우는 공사병립, 나를 바로 세움으로써 공의 세계를 열어가는 활사개공(活私開公), 건전한 민주국가를 건설하여 세계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세계대공을 말하였다.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스스로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가르친 도산은 새로운 기축시대의 패러다임을 만든 이다. ‘그(성현)의 시련’이 아니라 ‘나의 시련’을 노래한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나를 형성해간다고 노래하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Love yourself(Answer: Love myself)’, ‘Map of the Soul(outro: Ego)’도 나를 중심에 놓고 나를 사랑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라는 도산의 ‘나’철학과 일치한다. 도산의 철학과 사상은 20세기에 한정되지 않는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철학이며 ‘나’의 삶을 저마다 저답게 살려는 젊은이들의 철학이다.
흥사단은 도산의 정신과 철학을 깊이 바로 이해하여 그 정신과 철학을 널리 알리고 실행하는 단체다. 흥사단의 단우들은 단순히 도산을 믿고 따르는 데 머물러서는 도산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없다. 인생과 역사, 생명과 정신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근현대의 시대정신이 요구하고 도산이 그렇게 살았듯이, 도산의 정신과 철학을 잘 이어받아서 저마다 제 삶을 저답게 개성과 창의를 발휘하며 살아가야 한다.
* 글 : 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미주위원부 도산사상연구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