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삼남 랠프 안의 서거에 즈음하여
차만재│단우, 프레즈노 가주 주립대학 정치학 명예교수
1957년 로스엔젤레스에 유학 온 것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요소로, 그 영향 중 제일 중요한 것은 1960년 흥사단에 입단한 것이다.
20세를 막 넘긴 약관에 이민, 일세대 흥사단 단원 어르신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가족과 절친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안창호 선생님의 사모님 안혜련 여사, 큰아들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필립 그리고 맏딸 안수산과 흥사단 단소에서 만났다. 그리고 내게 가족이 운영하는 중국식당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제안하였다. 그 주부터 케시어겸 손님 안내와 계산대를 지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신년 파티가 있던 12월 식당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 쇄도하는 고객들을 맡는 일을 거들었다. 필립은 인기 있는 배우다 보니 자기 사진에 사인해달라는 손님이 줄을 섰고, 다른 가족들 차남 필선, 장녀 수잔, 차녀 수라, 막내 랠프가 식당일을 도왔다. 안혜련 사모님은 낮에 들러 식당 주변을 쭉 돌아보시고는 나를 신도유학생이라고 부르면서 말씀을 건내시곤 하셨다. 남가주 밴나이스 근처 파노라마 시티에 위치했던 문게이트(Moongate)란 이름의 이 식당은 요리사들을 홍콩에서 초청해 중국 음식을 조리해내는 고급 식당이었다.
안도산가족들 간의 우애와 결속은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종차별이 심했던 바깥세상에 맞서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었으며, 특히 맏아들 필립은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형제자매들을 돌보아야 하니, 자기 가정을 이루는 것을 희생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었다. 필립은 나에게 가족을 저버린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다 이승만 정부의 초청으로 고국방문 중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자네 부친이 앉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앉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가도 깜짝 놀랐다고 나에게 회고하였다.
랠프도 군사정권 때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나가 아버님 묘소를 보고 주변 사람들의 도산에 대한 경의와 사랑에 자기 아버지의 위치를 새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나는 본토 한인이민자 정착지가 있는 다뉴바 리들리 근처 프레즈노에 취직이 되어 중가주 한인 역사 연구발굴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중가주 한인역사 연구회에서 서울에 있는 독립문을 1/3 크기로 축소하여 리들리에 건립하게 되었다. 중가주와 관련된 열분의 애국지사 추모비가 독립문을 둘러싸고 있다. 생신년 순으로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이재수, 한시대, 김호, 김형순, 김종림, 송철, 김용중 선생들의 비가 세워져 있다.
2010년 독립문 헌정식 때, 열 분의 자손들을 모두 초청하였다. 당시 10월 가을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랠프와 통화로 ‘고령에 날씨도 좋지 않을 것 같으니 대신하여 다른 사람 보내도 된다.’고 했더니, 그때 랄프가 한 말이 ‘아니, 내 아버님이 나보고 참석하라고 하셨을 거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가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고인의 생활신조였다. ‘내 아버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했을까?’ 이것을 자기 생활의 지표로 삼고 95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도산의 아들다웠다. 자신의 부친이 그러하셨듯이 그 아들답게 한인 커뮤니티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다 해내었다. ‘그립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왔으면 가는 법, 고인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