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부파일 : 금요강좌 현황(1~1428회, 1954~1998년)
시대와 사람을 잇는 <흥사단 금요강좌>
시민 공개 교양강좌의 태동
흥사단 금요강좌는 1954년에 시민 공개 교양강좌로 시작했다. 이 강좌를 금요일에 시작한 것은 도산 선생이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창단한 날이 금요일이었던 것에 연유한다. 그 후 1964년 3월 21일 ‘금요개척자강좌’로 명칭을 바꾸었고, 1977년 대학로에 새 회관에서 ‘금요강좌’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이어졌다.
1954년 4월 9일 금요일 주요한의 ‘소련의 세계정책’으로 개강을 한 역사적인 첫 강좌에 1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첫 강좌와 같은 주제로 주요한이 2차례 더 강연한 후 12월 31일까지 모윤숙, 함석헌, 김윤경, 신상초, 박순천, 박종홍 등 26명의 강사가 37회의 강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61년 5·16쿠데타로 흥사단 활동이 정지될 때까지 291회의 강좌를 개최했다. 매년 8월과 1958년 6월 13일부터 11월 14일까지, 1960년 5월과 12월 16일부터 1961년 1월 27일까지 휴강을 한 외에는 거의 매주 쉬지 않고 강좌를 열었다. 청중은 1957년까지는 평균 100명 정도였으나 1958년부터 1969년경에는 평균 250명~300명 정도로 급증했다.
시민의 교양증진과 시민의식 함양이란 시대적 소명
당시 금요강좌가 시민에게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족상쟁으로 좌절과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50년대는 시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공개강좌가 흔하지 않은 때, 당시의 금요강좌 개설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정치와 경제, 철학과 사상, 사회, 교육, 문학, 종교, 역사, 언론,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당대의 석학, 저명한 교수와 언론인, 탁월한 경세가, 때로는 초야에 묻힌 야인들을 초빙하여 지성과 양심의 메시지를 시민에게 전했다. 매회 강좌 때마다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었으며, 때로는 관헌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금요강좌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들에게나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소통의 광장이었다. 대중매체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고 언론의 자유가 제약을 받던 그 시절, 흥사단의 금요강좌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금요강좌는 시민의 교양증진과 시민의식 함양에 시대적 소명을 다했음은 물론이며 나아가 민력을 증강시켜 민주주의를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함석헌 선생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1966년 11월에는 500회 돌파 기념으로 6회의 특별강좌를 실시하였다. 이 특별강좌는 ‘우리 민족의 기본 문제를 진단한다’라는 대주제로 11월 18일 ‘자립경제의 기본과제’(조동필 고려대 교수), 21일 ‘민주정치와 리더십’(차기벽 성균관대 교수), 22일 ‘후진국과 사회정의론’(양호민 『조선일보』 논설위원), 23일 ‘이상적 시민상을 형성하는 교육’(정범모 서울대 교수), 24일 ‘우리의 이상적 토대의 구축’(신인철 고려대 교수), 25일 ‘근대화의 핵심원리’(안병욱 숭실대 교수)등의 강좌가 이어졌다. 특히 1년에 한 번씩 있었던 함석헌의 강연은 단연 인기였다. 300석이 넘는 자리는 강연 30분 전에 만석이 되었고, 그러고도 100여 명의 청중이 강당의 통로나 복도를 메우게 되면 스피커를 설치하여 길거리에서도 강연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금요강좌는 1954년 4월 9일 첫 회가 시작된 이래 1982년 11월 12일 1천 회를 기록하기까지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기 있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1987년으로 들어서면서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매체의 발달로 금요강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6월 민주항쟁 이후 금요강좌는 민주화 인사들과 뜻있는 정치인들을 연사로 초청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9월 11일 1,144회에는 후일 15대 대통령이 된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을 초청해 ‘민족발전을 위한 나의 정치철학’을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1991년에도 32회에 걸쳐 금요강좌가 실시되었다. 11월 8일 1,282회 금요강좌는 도산 탄신 113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었다. 이날 강연은 도산사상연구회 제2대 회장 한기언의 ‘도산사상과 교육의 세기’와 조동걸의 ‘독립운동사에서의 도산의 위치’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한편 1,300회를 기념하여 ‘민족통일,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대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기획하고, 1992년 5월 6일부터 6월 13일까지 광주, 대구, 대전, 울산, 마산에서 각각 금요강좌를 진행했다. 1,300회 금요강좌는 6월 5일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이영희 교수를 초청하여 ‘남북한 군사 긴장완화의 조건’을 주제로 개최하였다. 1993년에는 24회의 강좌가 진행되었고, 그 가운데 3차례 토론회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금요강좌가 시작된 초기 5,60년대에는 강의를 담당할 전문가도 부족했고 대중매체도 발달하지 않아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수준 높은 시민교육 프로그램으로 독보적인 위상을 담당했다. 특히 자유당 독재와 군부독재 시기에는 비판적 지성인의 소통 공간으로 금요강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주화의 진전과 대중 매체의 발달로 금요강좌의 매력과 인기도 서서히 쇠퇴하게 되어 운영방법의 변화를 다양하게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 흐름에 맞게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금요강좌
1,319회 금요강좌를 토론회로 전환하기로 하고 1993년 3월 26일 ‘시민운동의 방향 모색과 민간단체의 역할’을 주제로 유재현, 박성규, 이덕승 등 3인의 발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으며, 1,324회는 ‘경제 개혁 이렇게 되어야 한다’를 주제로 강철규, 김경환, 강순희 3인의 발제와 토론으로, 1,331회는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차준엽, 김성수, 이진아 3인의 발제와 토론으로 각각 진행되었다.
1994년 금요강좌는 기획강좌를 중심으로 총 27회가 실시되었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를 반영하여 ‘자치시대를 향한 생활정치’를 주제로 한 16대 노무현 대통령(당시 민주당 최고위원), 장기표(1,343회), 이재오(1,345회), 김근태(1,356회), 박찬종(1,358회) 등 유명 정치인의 강의가 이루어졌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광복 50주년에 바라보는 2000년대 통일한국의 웅비 전략’을 주제로 특별기획 10회(1,367회~1,376회) 강좌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하반기에는 ‘해방 50년, 한국사회의 성찰과 과제’를 주제로 10회(1,377회~1,386회) 강좌를 실시하였다.
국민계몽과 사회교육 기능을 담당했던 금요강좌는 다양한 시도 끝에 1998년 10월 23일 1,430회 금요강좌부터는 금요토론회로 전면 개편하기에 이른다. 2017년 현재, 흥사단금요통일포럼(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주최), 투명사회포럼(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주최), 시민교육포럼(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주최) 등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